역사의 숨은 설계자

[역사의 숨은 설계자]71. 엘리 위젤(Elie Wiesel)-홀로코스트의 생존자에서 기억의 설계자로

diary52937 2025. 7. 22. 16:49

전체주의와 집단학살의 역사

20세기 중반, 인류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비극 중 하나를 경험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은 단순한 영토 분쟁이 아니라, 수많은 민간인이 목숨을 잃고, 인종청소와 전체주의 체제의 잔혹성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시기였다. 특히 나치 독일이 저지른 홀로코스트(Holocaust)는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 집시, 정치범, 동성애자, 장애인 등을 체계적으로 학살한 국가적 범죄였다.

6백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살해당한 이 참극은 단지 수치상의 통계를 넘어, 문명과 이성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증명한 역사적 경고이기도 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 비극은 쉽게 말로 설명될 수 없었고, 생존자들의 증언 없이는 그 잔혹함조차 온전히 전달되기 어려웠다.

이런 역사적 공백과 침묵의 틈 속에서 엘리 위젤(Elie Wiesel)이 나타났다. 그는 집단학살을 생존한 한 개인으로서, 인간의 윤리와 신앙, 기억과 문학의 경계를 질문한 작가이자 사상가였다. 위젤은 “침묵은 가해자의 편”이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전 세계에 증언의 윤리와 기억의 필요성을 역설한 인물로 기억된다.

잔혹한 역사의 침묵을 뚫고 증언자가 된 생존자

엘리 위젤은 1928년 9월 30일 루마니아 시게트(Sighet)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고향은 헝가리령으로, 위젤은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토라와 탈무드를 배우며 경건하게 자랐다. 그러나 1944년, 나치 독일이 헝가리를 점령하면서 15세의 나이에 가족과 함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어머니와 여동생은 즉시 가스실로 보내졌으며, 아버지와는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함께 지내다 부친마저 눈앞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 위젤은 프랑스의 고아원에서 지내며 철학과 문학을 공부했고, 이후 기자로 활동하면서 세계를 돌아다니며 증언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잡지 기자로 활동하던 중, 작가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권유로 수용소 체험을 쓴 회고록이자 그의 대표작인 소설《밤(Night, 1956)》은 홀로코스트 체험 문학의 고전이 되었고 침묵했던 생존자 문학의 물꼬를 튼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미국으로 이주한 후 그는 뉴욕에서 대학 강의와 인권운동을 병행하며, 끊임없이 증언과 윤리에 대해 글을 썼다. 1986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 "침묵을 깨뜨린 증언자"로서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다. 위젤은 2016년 7월 2일, 미국 뉴욕에서 87세의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는 죽은 후에도 살아있는 질문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는가?"

문학으로 쓴 윤리, 세계를 흔든 증언의 목소리

엘리 위젤의 대표작인 《밤(Night)》은 단순한 생존기의 수준을 넘어, 문학과 철학, 종교적 고뇌가 한데 어우러진 증언문학의 상징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은 전 세계 30개국 이상에서 번역되어 수천만 부가 팔렸으며, 청소년 교육과 인권교육의 필수 자료로 채택되었다. 그는 《새벽》, 《낮》, 《재와 불꽃》, 《망각의 강》 등 수십 편의 소설과 논픽션, 강연록을 통해 ‘어떻게 인간은 인간에게 그토록 잔혹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다.

그는 단지 과거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역사를 현재로 끌어와 인간성과 도덕성에 대한 반성을 유도했다. 특히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신앙을 잃고도, 윤리를 되찾고자 한 인간의 내적 투쟁을 고통스럽게 그려내며, 독자들에게도 신의 부재, 인간의 악의 평범성, 그리고 기억의 윤리를 되묻게 했다.

노벨 평화상 수상 후 그는 유엔과 전 세계 정부를 대상으로 인도적 개입과 반인종차별 정책을 촉구했으며, 1990년대에는 보스니아 내전, 르완다 대학살, 수단 분쟁 등에서 침묵하는 국제사회를 비판하며 ‘도덕적 증언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미국 대통령의 인권 자문 위원으로 활동하며 국가 권력에 맞서 인권의 보편성을 주장한 인물로도 기억된다.

기억의 설계자 인간 연대의 윤리를 실천하다

엘리 위젤은 문학, 교육, 정치, 종교를 넘나든 다차원적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이었다. 그는 단순한 작가가 아니라, 기억의 설계자이자 인류 공동체의 윤리적 이정표가 되었다. 그의 글은 유럽 홀로코스트 교육의 핵심 교재로 사용되었으며, 미국과 캐나다, 이스라엘 등에서는 인권기념관, 위젤 문학관, 윤리교육센터 등이 그의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또한 그는 예일대, 보스턴대 등에서 유대신학, 철학, 인권학 등을 가르치며 젊은 세대에게 역사적 책임감을 심어주었고, 학생들에게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역사의 증인이 될 것”이라는 책임감을 각인시켰다. 그의 강의는 단지 정보가 아니라 하나의 ‘체험’으로 여겨질 만큼, 도덕적 감수성을 일깨우는 과정이었다.

그의 활동은 전 지구적이었다. 그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아프리카, 동유럽, 남미 등 전쟁과 학살의 현장을 직접 방문하고, 피해자와 함께 연대하며 기억의 정치학을 넘은 인간 연대의 윤리를 실천했다. 위젤은 “무관심은 가해자의 또 다른 얼굴”이라며, 중립과 침묵이 도덕적 범죄가 될 수 있음을 역설했다.

잔혹한 역사에서 인간의 존업성과 역사적 책임감을 강조한 엘리 위젤

인간의 존엄성과 역사적 책임감을 남기다

엘리 위젤은 사후에도 여전히 뜨거운 논쟁의 중심에 있다. 대다수 학자와 인권운동가들은 그를 "20세기 최대의 윤리적 증언자"로 추앙한다. 그는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를 생존자로서 기록했고, 그 기록을 토대로 전 세계에 인권과 도덕적 책임의 필요성을 끊임없이 외쳤다. 나치의 피해자가 권력을 가진 증언자로 변모한 사례는 역사적으로도 보기 드문 사례였다.

하지만 일부 평론가들은 위젤이 특정 정치적 입장에 과도하게 기대었다는 점에서 비판적인 시각을 갖기도 한다. 특히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에 있어, 위젤이 이스라엘 정부의 정책에 지나치게 우호적이며, 팔레스타인 인권 문제에 침묵했다는 지적은 그의 보편 윤리와의 괴리를 드러낸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문학적으로도 그의 증언이 지나치게 종교적 혹은 감정적이라는 평가와, 반대로 차가운 기록의 형식을 택한 ‘기억의 서술’이라는 평가가 공존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의 작업이 인간의 존엄성과 역사적 책임감을 지키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오늘날 우리는 다시 혐오와 배제, 무관심과 가짜 뉴스가 확산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시기에 엘리 위젤이 남긴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모두 증인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가해자 옆에 서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