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은 설계자

[역사의 숨은 설계자]69.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 천재적 영상 미학과 정치적 도덕성의 경계에서 논란인 설계자

diary52937 2025. 7. 22. 04:19

나치즘의 부상과 선전 도구가 된 미디어

20세기 초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화 이후, 극심한 경제 불안과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독일은 전쟁 패전의 충격 속에서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를 출범시켰지만, 하이퍼 인플레이션과 사회 갈등으로 인해 국민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0~30년대 극우 민족주의 세력, 즉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NSDAP)이 급부상하였고, 1933년 히틀러가 총리에 임명되며 나치 독재 체제가 시작되었다.

히틀러는 국민의 정서와 충성을 끌어내기 위해 문화와 예술, 특히 영상 매체를 정치 선전 도구로 적극 활용하고자 했다. 이 시기는 영화가 막 사운드와 편집, 카메라 워크를 고도화하던 시기였으며, 시청각 매체를 통해 대중 감정과 국가 이념을 직관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기술적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다.

이런 시점에서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은 등장한다. 원래 배우로 시작했지만, 곧 영화감독으로 전향하여 독일 표현주의적 영상미학과 다큐멘터리 스타일을 결합한 새로운 영상 언어를 구축했다. 그녀는 히틀러 정권의 주목을 받았고, 나치의 이념과 체제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핵심적인 영화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된다. 그 결과물은 전 세계적으로 ‘예술과 정치 선전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논쟁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배우에서 감독, 그리고 사진작가로 이어진 101년의 궤적

레니 리펜슈탈은 1902년 8월 22일, 독일 베를린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적부터 무용과 미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청년기에는 표현주의 무용수로 활동하다가 1925년경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그녀는 독일 산악영화(Mountain Film) 장르에서 아놀드 판크 감독과 함께 출연하며 배우로 이름을 알렸다.

1932년, 리펜슈탈은 직접 감독과 각본을 맡은 첫 작품 《푸른 빛(Das Blaue Licht)》을 제작하며 감독으로 데뷔하였다. 이 작품은 시각적 구성이 독창적이었고, 초현실주의적 아름다움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후 히틀러가 그녀의 영화를 감명 깊게 보았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녀는 나치 정권의 공식 행사 영화를 제작하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의지의 승리(Triumph des Willens, 1935)》와 《올림피아(Olympia, 1938)》이다. 두 작품 모두 탁월한 카메라 워크와 편집 기술로 세계 영화사에 획기적인 영향을 끼쳤으나, 동시에 나치 선전이라는 비판을 강하게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리펜슈탈은 연합군에 의해 체포되어 조사받았지만, 공식적인 나치당 가입 기록은 없어 형사처벌은 면했다. 하지만 이후 수십 년간 그녀의 사회적 명성은 실추되었고, 독일 내에서 영상 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말년에는 아프리카 누바 부족을 촬영한 사진작업과 해양 다큐멘터리 등으로 새로운 도전을 이어갔다. 2003년 9월 8일, 101세의 나이로 독일 펠다핑에서 사망하였다.

영상미학의 혁신자, 다큐멘터리 기법의 설계자

리펜슈탈은 기술적으로 현대 다큐멘터리 영화와 시각 미디어의 전환점을 만든 인물이다. 그녀의 대표작 《의지의 승리》는 1934년 나치당 전당대회를 기록한 영화로, 군중, 상징, 연설을 조합하여 집단 감정과 정치 권력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이 영화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히틀러의 장면으로 시작, 인간을 초월한 권력처럼 묘사했으며, 음향, 리듬, 몽타주 기법을 통해 사실을 재구성한 최초의 '정치적 다큐멘터리'로 평가받는다.

《올림피아》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로, 슬로우 모션, 항공 촬영, 트래킹 샷, 고속촬영 기법 등 다양한 기술을 세계 최초로 도입해 스포츠 다큐멘터리의 교과서로 불릴 만큼 뛰어난 예술성을 보여주었다.  특히 미학적으로 완벽한 신체의 묘사와 고전 조각처럼 구성된 스포츠 장면은 후대 수많은 스포츠 영상에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영상에 있어서 “주제의 감정과 형식의 조화를 가장 완벽하게 구현한 감독 중 한 명”으로 평가되며, 영상 편집과 카메라 무빙, 장면 구도의 기초를 현대 영상예술에 남겼다. 오늘날 뮤직비디오, 광고, 스포츠 중계, 다큐멘터리 등에서 그녀의 기법이 흔히 사용된다.

하지만 리펜슈탈의 작품은 그 예술적 성취만큼이나 선전 도구로 쓰였다는 정치적 논란도 동시에 안고 있다. 그녀의 작업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철저하게 나치 정권의 우월성과 힘을 선전하려는 명확한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었고, 단순한 예술을 넘어서 '선전 영화'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오명을 벗지 못한 천재 감독

리펜슈탈은 독일 내에서 영상 예술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은 인물이었다. 그녀 이전의 독일 영화는 주로 실내 세트와 극적 연기로 구성되었으나, 리펜슈탈은 야외 자연, 대규모 군중, 공공 의식을 예술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는 프로파간다와 미학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냈다.

비록 그녀는 전후 독일 사회에서 나치 협력자의 오명을 벗지 못했지만, 국제 영화계에서는 순수 기술적 영향력으로 인해 여전히 언급되는 감독이다. 미국의 영화감독 조지 루카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올리버 스톤 등도 그녀의 영상 편집과 상징적 구도를 학습 대상으로 삼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사진작가로서의 리펜슈탈도 주목할 만하다. 1970~80년대에는 아프리카 누바 부족을 촬영한 인류학적 사진 시리즈를 발표하며 예술계에 복귀를 시도했다. 이 작업은 인체의 아름다움을 예술적으로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일부에서는 식민주의적 시선이 투영되었다는 비판도 함께 제기되었다.

그녀는 또한 여성 감독으로서 최초로 대규모 국제 프로젝트를 독자적으로 연출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페미니즘 영화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작품은 권력의 남성성과 전체주의 질서를 시각적으로 찬미했다는 이유로 페미니즘 내에서도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천재적 영상 미학과 정치적 도덕성의 경계에서 상반된 논란으로 남은 천재 여성 감독 레니 리펜슈탈

상반된 평가를 받는 영상 미학 설계자

레니 리펜슈탈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까지도 명확히 분리된다. 예술사 측면에서는 영상미학을 혁신한 천재감독, 정치사 측면에서는 독재를 미화한 선전가라는 이중적 위치에 놓여 있다. 그녀는 수많은 기술적 성취와 예술적 비전을 남겼지만, 그 작업이 봉사한 이념이 반인륜적 전체주의 체제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지울 수 없다.

일부 학자와 예술가는 그녀의 작품을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독립적인 미학적 결과물로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예술의 자율성’을 강조한다. 반면, 다른 비평가들은 예술은 언제나 정치적이며, 선전은 형태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결국 억압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리펜슈탈은 말년까지도 자신이 정치적 선전에 연루된 적이 없으며, 단지 예술만 추구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감독한 장면에 등장한 SA(나치 돌격대)나 히틀러의 연설을 '그저 기록했을 뿐'이라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만들어내는 미학적 감정을 의도적으로 강화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중립성을 의심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영상 매체가 인간 감정과 정치적 신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최초로 실험한 인물 중 하나이며, 오늘날의 프로파간다, 선거 광고, 대중 설득 영상물에도 여전히 그녀의 방식이 응용되고 있다. 이는 우리에게 질문을 남긴다. "완벽한 영상은 진실을 보여주는가, 아니면 감춘 진실을 아름답게 포장하는가?" 이 질문은 리펜슈탈이 남긴 가장 근본적인 유산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