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 과학과 인간 본성 사이의 정체성 위기
20세기 중반, 세계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급격한 과학기술의 진보와 함께 인간 행동에 대한 새로운 질문에 직면했다. 물리학과 생명과학은 실험과 수학적 모델을 통해 엄청난 성과를 올리는 반면, 사회과학은 여전히 개념적 모호성과 방법론적 혼란 속에서 이론의 기초를 확립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인간 행동과 심리, 사회구조, 정치적 의사결정 등의 영역은 복잡하고 변수가 많은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방법으로 다루려는 시도는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지 못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베버(Max Weber)의 해석사회학, 파슨스(Talcott Parsons)의 구조기능주의, 베이컨적 귀납주의, 논리실증주의 등이 각축을 벌였으나, 행동과학(Behavioral Science)의 체계적 방법론은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 이처럼 경험과학의 엄밀성 vs 인간 복잡성에 대한 해석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던 상황 속에, 철학자이자 논리학자인 아브라함 카플란은 과학적 방법론을 사회과학에 이식할 수 있는 이론적 다리를 놓기 시작한다.
1964년에 출간된 그의 대표작 《The Conduct of Inquiry: Methodology for Behavioral Science》는 행동과학을 위한 본격적 방법론 체계를 처음으로 제시한 저서로 평가받는다. 그는 단지 철학적 논쟁에 머무르지 않고, 실질적인 연구 설계와 과학적 탐구의 구조를 안내하는 설계도를 남겼으며, 이로써 사회과학이 하나의 과학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토대를 제공했다.
지식 간 경계를 넘나든 사상가
아브라함 카플란은 1918년 6월 11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철학과 수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철학을 전공한 뒤 1940년대부터 본격적인 연구와 강의를 시작했다. 초기에는 분석철학, 논리학, 과학철학에 집중하며, 특히 실증주의와 과학의 인식론적 구조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켰다.
1950~60년대, 그는 사회과학이 과학적 탐구로서 정립되려면 철학적 기반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 도달하게 되었고, 이 시기 하버드와 UCLA, 미시건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과학철학과 행동과학의 접점을 탐구했다. 그의 목표는 단순히 과학적 이론을 사회과학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과학이 독자적인 방법론을 정립할 수 있도록 철학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후 1964년, 그는 대표 저서 《The Conduct of Inquiry: Methodology for Behavioral Science》를 출간하며 학계에서 행동과학 방법론의 창시자로 인정받았다. 이 저서는 철학, 논리, 경험주의, 사회과학 이론을 종합해 행동과학의 기반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시도로 평가받으며, 미국 심리학회, 교육학회, 정치학회, 커뮤니케이션학회 등 여러 분야에서 인용되었다. 그의 사상은 찰스 퍼스, 윌리엄 제임스, 존 듀이 등 미국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받아, 실용적이고 경험주의적인 인식론을 바탕으로 했다.
그는 말년에 하와이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동양 철학과 비교 윤리학, 문화 간 이해의 철학까지도 탐구했으며, 1993년 9월 19일, 75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그의 죽음은 조용했지만, 그가 남긴 이론은 수많은 연구자의 연구 설계 속에 살아 있다.
사회과학의 방법론을 철학으로 설계하다
아브라함 카플란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은 단연 《The Conduct of Inquiry》에서 제시한 행동과학의 방법론 체계이다. 이 책에서 그는 과학 탐구를 이론 형성 → 개념 조작화 → 측정과 검증 → 해석의 흐름으로 분석하면서, 각 단계에 요구되는 철학적 기초와 논리적 원칙을 상세히 제시했다.
그는 행동과학이 “과학처럼 보이기 위해 과학적 언어를 흉내 내는 것”을 경계하며, 진정한 과학이 되기 위해서는 그 기초가 되는 철학, 특히 인식론적 엄밀성과 경험론적 수단 사이의 균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개념들을 중점적으로 발전시켰다:
- 조작적 정의(Operational Definition): 개념이 실험과 측정 가능하도록 구체화되어야 한다.
- 이론적 개념 vs 경험적 지표 구분: 추상적 개념을 경험적 현실과 연결하는 구조가 중요하다.
- 탐색적, 기술적, 설명적 연구 유형의 명확한 구분
- 패러다임 전환 이전의 다층적 이론 모형 존재 인정
또한 그는 ‘개념적 혼동은 과학 발전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문제의식을 강조하며, 사회과학자들이 철학적 사고 없이 이론과 데이터를 혼합하거나, 명료하지 않은 개념을 사용할 때 생기는 오류를 지적했다. 이는 단순히 철학자의 비판이 아니라, 구체적 연구 설계를 위한 실천적 지침이기도 했다.
그의 이론은 오늘날 사회과학에서 쓰이는 변인설정, 가설 구성, 측정 설계, 인과성 해석 등의 방법론적 기준을 설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이후 등장한 수많은 연구 방법론 교재가 그의 체계를 토대로 구성되었다. 그는 방법을 정의한 이론가가 아니라, 방법 자체를 설계했다.
심리학, 교육학, 커뮤니케이션학, 정책과학까지
카플란의 영향력은 철학을 넘어 사회과학 전 영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그는 철학자로서 심리학, 사회학, 교육학, 정치학, 커뮤니케이션학 등 다양한 분야에 공통된 방법론적 기준과 분석 도구를 제시했다. 그의 저서는 학제 간 연구를 위한 이론적 가이드로 작용했으며, 이는 지금도 수많은 학위 논문, 정책 보고서, 연구 설계에서 인용되고 있다.
특히 미국과 유럽의 주요 대학에서는 그의 저서가 사회과학 방법론 필수 교과서로 사용되었으며, 교육심리학자 벤저민 블룸, 정책과학자 해럴드 라스웰, 커뮤니케이션 이론가 윌버 슈람 등도 그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는 일종의 ‘이론적 설계 엔지니어’로, 수많은 지식 생산자들이 그의 지도를 바탕으로 새로운 연구를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그는 학문적 경계를 넘나들며 양적 연구와 질적 연구의 연결 가능성을 탐색한 초기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논리실증주의와 해석학 사이의 중간 지점을 모색하며, 사회과학이 데이터 수집뿐 아니라, 의미 해석의 과정을 통해 인간 행동을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이후 혼합연구(mixed method research)로 발전했다.
카플란은 단지 한 시대의 이론가가 아니라, 사회과학의 언어, 기준, 연구자의 사고 틀을 설계한 숨은 설계자였다.
말보다 구조를 남긴 이론의 설계자
아브라함 카플란은 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론을 남기기보다 ‘연구 구조를 설계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이론은 현재까지도 심리학 실험 설계, 교육 연구, 정책평가 보고서 등에서 살아 있으며, “행동과학의 탐구는 철학적 명료성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철학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는 ‘이론’보다 ‘탐구 과정’을 중요시했으며, 연구자의 사고과정을 구조화하는 도구를 제공했다. 이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그를 “과학철학자이자 연구설계자”, “실천 철학자”라고 부른다.
비판도 존재한다. 일부 후속 이론가들은 카플란의 이론이 지나치게 형식주의적이며, 사회적 맥락이나 권력, 문화 차원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고 본다. 그러나 카플란은 어디까지나 기초 구조를 정립한 설계자였고, 후속 세대가 그 위에 다양한 층위를 쌓을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한 점에서 그 공로는 확고하다.
그는 생전 이렇게 말했다:
“좋은 질문은 답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나는 좋은 질문을 구조화하는 방법을 남기고 싶다.”
이 철학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며, 행동과학과 사회과학의 수많은 연구자들은 카플란이 설계한 질문의 구조 속에서 새로운 해답을 탐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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