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은 설계자

[역사의 숨은 설계자]35.마리아 시빌라 메리안(Maria Sibylla Merian)식민지 시대 생태학의 기초를 세우다.

diary52937 2025. 7. 8. 09:16

제국, 과학, 식민주의가 뒤섞인 배제의 시대

17세기 유럽은 정치적 확장과 과학적 발견이 동시에 일어나던 시대였다.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에 이르는 해외 식민지를 차지하려 했고, 이를 통해 막대한 자원과 권력을 확보하려고 경쟁하였다. 이 시기 네덜란드는 해상 무역과 식민지 정책을 통해 세계적인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었으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는 아시아 및 남미 식민지를 통치하며 세계를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다.

한편 유럽 내부에서는 ‘과학혁명’이라 불리는 지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 등으로 이어진 천문학과 수학의 발전은 자연에 대한 인식 방식을 바꾸었고, 실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경험주의 과학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생물학, 지리학, 해부학, 식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제 관찰에 기반한 연구가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여성은 여전히 학문과 과학의 영역에서 배제되고 있었다. 여성은 정식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 대부분의 과학 문헌이나 연구기관은 남성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한 여성 예술가이자 관찰자가 등장하게 된다. 그녀는 단순히 아름다움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라, 자연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기록하여 식민지 시대 생물학과 생태학의 기초를 세운 숨겨진 역사 설계자였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시빌라 메리안이다.

여성 과학자의 길을 걷기까지

마리아 시빌라 메리안은 1647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유명한 판화가이자 출판인이었던 마티아스 메리안(Matthäus Merian)으로, 그녀는 어릴 적부터 세밀화와 조각, 인쇄에 익숙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녀가 3살이 되던 1650년에 사망하였고, 어머니는 화가 야콥 말렐(Jacob Marrel)과 재혼하였다. 말렐은 정물화와 식물화를 그리는 예술가였으며, 메리안은 그의 작업실에서 그림과 식물 세밀화를 배우게 되었다.

1665년, 18세가 된 메리안은 자신의 스승이었던 요한 안드레아스 그라프와 결혼하였다. 이 결혼을 통해 그녀는 뉘른베르크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자신의 식물 그림과 곤충 관찰을 병행하였다. 그녀는 1669년에 자신의 첫 번째 저서 《꽃과 곤충의 책》을 출판하였고, 여기에서 이미 곤충의 변태 과정에 대한 관심과 관찰 결과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1685년, 메리안은 남편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두 딸과 함께 네덜란드 프리슬란트 지역의 라베다 공동체로 이주했다. 이곳은 루터교의 금욕주의 공동체였으며, 메리안은 그곳에서 자연에 대한 내면적 탐구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곧 예술과 과학적 관찰의 열정을 억누를 수 없었고, 1691년에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여 본격적인 과학 예술가로서 활동을 시작한다.

1699년, 그녀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허가를 받아 딸 도로테아와 함께 남아메리카의 수리남으로 탐험을 떠난다. 이 여행은 당시 여성에게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으며, 실제로 유럽 여성 최초의 열대 탐험으로 기록된다. 그녀는 2년간 열대 식물과 곤충, 동물들을 관찰하고, 그 과정에서 생태계의 상호작용을 기록하였다. 이후 1701년에 유럽으로 귀국하여, 관찰한 내용을 토대로 자신의 대표작을 준비하게 된다.

배제의 시대에도 관창을 통해 생태학의 새로운 시선을 설계한 마리아 시빌라 메리안

관찰을 통해 생물학적 법칙을 입증하다

마리아 메리안은 수리남 탐사 이후, 1705년 《수리남 곤충 변태도(Metamorphosis Insectorum Surinamensium)》를 출판하였다. 이 책은 단순한 곤충 도감이 아니었다. 그녀는 곤충이 알에서 유충, 번데기를 거쳐 성충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직접 관찰하고 그림으로 그려냈으며, 각각의 곤충이 어떤 식물을 먹고,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지에 대한 정보도 함께 기록하였다.

이 작업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생물학적 접근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곤충의 발생 과정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고, 곤충이 흙이나 부패한 물질에서 ‘자연발생’한다고 믿는 학설이 우세했다. 그러나 메리안은 실제 관찰을 통해 곤충의 발생 과정이 일정한 순서와 생물학적 법칙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그녀는 이를 그림, 글, 도표 등으로 시각화하였고, 이 자료들은 후대 생물학자들의 연구 기반이 되었다.

또한 그녀는 식물과 곤충이 상호 의존하며 살아가는 생태계를 처음으로 서술하였다. 예를 들어 어떤 나비가 특정한 식물의 잎만 먹고 자라며, 특정 계절에만 발생한다는 것을 기술하였다. 이는 ‘먹이 사슬’과 ‘서식지 생태’ 개념의 초기 형태라고 볼 수 있으며, 그녀는 이러한 관찰을 통해 생태학이라는 학문의 토대를 시각적으로 구축한 최초의 인물 중 하나로 평가된다.

1705년 이 책이 출판되자 학계와 예술계는 동시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책에 실린 그림들은 과학적으로 매우 정확하면서도 뛰어난 예술적 가치를 지녔다. 이는 과학적 관찰을 기반으로 한 세밀화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였다. 유럽 각국의 박물관, 식물학자, 생물학자들은 그녀의 저서를 수집하였고, 그녀의 관찰 기록은 이후 18세기 생물 분류 체계 정립에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다.

역사 속의 생물학적 질서를 재구성한 설계자

마리아 메리안은 과학사에서 보기 드문 존재였다. 그녀는 남성 중심의 제도와 학문 질서에서 벗어나 있었고, 정식 대학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지만, 현장에서의 실험과 탐험, 그리고 자신의 눈으로 본 자연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다. 그녀는 곤충과 식물을 관찰하면서 그 배경에 있는 문화적, 정치적 구조에도 주목했다.

수리남 탐험 당시, 그녀는 노예제 사회와 식민지 농장의 현실을 목격하였다. 그녀는 유럽 식민주의가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을 억압하는 구조라는 점을 인식하였고, 일부 기록에서는 노예 여성들이 전통 지식으로 자연을 해석하고 활용하는 모습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는 서구 과학이 식민지 지식을 흡수하면서도 억압했던 구조를 드러내는 초기 기록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녀의 관찰 방식은 ‘제국의 시선’이 아닌, 자연과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비제도권적 시선이었다. 이는 단순히 생물학적 정보가 아니라, 과학과 사회,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그녀는 명확하게 "나는 자연을 그저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그 내부에서 이해하려 한다"고 기록에 남겼으며, 이는 오늘날 과학 인문학에서 강조되는 ‘통합적 관찰자’의 태도를 미리 실천한 것이다. 

그녀는 1715년 뇌졸증으로 쓰러져 부분 마비가 왔으며, 이로 인해 작업에 큰 타격을 받는다. 1717년 1월 13일 암스테르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녀의 노트와 세밀화, 기록들은 딸 도로테아와 손녀를 통해 후대에 계승되었고, 그녀의 업적은 오랜 기간 저평가 되거나 잊혀졌으나, 20세기 말부터 재조명되기 시작한다. 

자연과 과학의 구조를 설계한 여성 과학자

마리아 시빌라 메리안이 생전에 남긴 그림과 기록은 단지 곤충 도감이나 예술 작품이 아니라, 근대 생물학의 이정표로 남게 되었다. 그녀의 《수리남 곤충 변태도》는 18세기 이후 린네의 생물 분류 체계에도 영향을 주었고, 그녀의 그림은 유럽 왕립 과학 아카데미에서 교육 자료로 사용되었다. 그녀가 보여준 실물 기반 관찰, 종 간 상호작용 기록, 계절적 주기 설명 등은 현대 생태학의 기초 개념과 직결된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여성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현장 중심 관찰자’로서 과학에 기여한 최초의 인물 중 하나였다. 그녀는 여성도 과학자가 될 수 있고, 과학이 예술과 결합할 수 있으며, 지식은 제도 밖에서도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하였다. 이는 오늘날 여성 STEM 연구자들의 역사적 계보 속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또한 그녀는 식민지 탐험이라는 행위가 단순한 자원 채굴이 아닌, 문화 간 지식 교류와 자연 생태의 기록이라는 측면을 강조하였다. 그녀는 유럽 중심주의적 시선에서 벗어나, 식민지 사회의 구성원들이 지닌 자연에 대한 이해를 존중하였다. 이는 오늘날 식민주의 비판 생태학에서 ‘지식의 탈식민화’라는 개념과 직접 연결되는 지점이다.

마리아 시빌라 메리안은 숨겨진 이름이었지만, 그녀가 설계한 시각적 자료, 과학적 사고방식, 생태학적 인식은 3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녀는 분명히 자연사와 과학사의 구조를 새롭게 설계한 역사 속의 설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