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은 설계자

[역사의 숨은 설계자]34.요한 요아힘 베허 (Johann Joachim Becher) 독일의 산업 공동체를 설계하다

diary52937 2025. 7. 8. 03:28

30년 전쟁 이후 무너진 경제를 다시 세우다.

17세기 유럽, 특히 독일 지역은 30년 전쟁(1618~1648) 이후 극심한 혼란과 경제적 파괴 속에 놓여 있었다. 이 전쟁은 단순한 종교 전쟁을 넘어 정치적, 경제적 분열까지 일으켰고, 수많은 도시와 농촌이 파괴되었으며 인구의 30% 이상이 감소할 정도로 참혹한 피해를 남겼다. 전쟁이 끝났지만, 사회 구조는 무너져 있었고 상업과 산업은 거의 마비된 상태였다. 신성로마제국 내부의 각 지역은 재건을 위해 새로운 경제 정책과 기술 혁신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 시기 유럽 각국은 절대왕정을 강화하며 중앙집권 체제를 수립하려 했고, 그 기반이 되는 것은 바로 ‘국가 경제’였다. 특히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무너진 상업과 수공업을 다시 살리기 위해 경제 기획자들을 필요로 했다. 프랑스에서는 콜베르가 중상주의를 통해 제조업과 무역을 국가 주도로 육성하고 있었고, 이에 자극받은 오스트리아와 독일 내 국가들도 기술과 행정을 결합한 정책 중심의 경제 체계를 원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요한 요아힘 베허였다. 그는 단순한 과학자나 학자가 아니라, 국가의 재건을 위해 철저히 현실적인 계획과 이론을 바탕으로 움직인 경제와 산업의 종합 설계자였다. 그는 과학, 행정, 기술, 상업, 정책을 아우르는 다방면의 활동을 통해 무너진 국가 시스템을 다시 세우는 데 기여했으며, 오늘날 국가 주도의 경제 정책 개념의 초석을 닦은 인물로 평가된다.

실험정신과 지식의 웅합을 추구한 독창적인 설계자 요한 요하임 베허

독학으로 과학과 산업의 길을 설계하다

요한 요아힘 베허는 1635년 독일 슈파이어(Speyer)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부터 생계를 위해 직접 일을 하며 어머니와 형제들을 부양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학문에 대한 강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라틴어, 철학, 자연과학을 독학으로 공부했다. 어린 나이에 그는 수학, 물리학, 화학에 대한 재능을 인정받으며 주변 지식인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657년 마인츠 대학교 의학 교수로 임명되어, 주교 겸 선제후의 주치의가 되었다.

20대 초반에 그는 알자스 지역의 학자 및 상공인들과 교류하며 경제 구조와 도시 기술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베허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실의 초청을 받아 빈(Wien)에서 활동하게 되는데, 이 시기 그는 과학자로서뿐 아니라 경제 고문, 행정 개혁가, 산업 정책 설계자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는 무려 30개 이상의 책을 집필했으며, 그 중 다수가 경제, 제조업, 무역, 정책 기획과 관련된 실용서였다.

그의 생각은 당시 전통적인 귀족 중심 행정이나 교회 중심 교육과는 매우 다른 방향을 지향했다. 그는 권위보다는 실무, 이론보다는 실행을 중시했고, 경제와 과학, 정책을 통합한 독자적인 국가 운영 모델을 구상했다. 그는 대학에만 머물지 않고 직접 현장을 방문하며 기술자, 상인, 장인들과 협업했으며, 수차례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실질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의 많은 제안과 개혁들은 성공적이었으나, 정치적 반대와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682년 런던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국가 산업 육성을 위한 ‘산업 공동체'를 설계

베허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그가 직접 구상하고 설계한 산업 공동체(Manufaktur-Gemeinschaft) 모델이다. 당시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독일 지역은 전쟁으로 인해 기술 인력이 유실되고, 수공업 체계가 붕괴되면서 국가 경제가 붕괴 직전이었다. 베허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국가가 직접 공장을 세우고, 장인을 고용하며, 상품 생산과 유통까지 체계화하는 모델을 제안했다. 이 시스템은 오늘날 ‘국영 공업’, 또는 ‘산업 클러스터’ 개념과 유사하며, 국가가 계획적으로 산업을 육성하는 형태였다.

그는 장인들이 개별적으로 생산하는 방식은 기술의 표준화도 어렵고, 생산성도 낮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그는 장인들을 한 공간에 모아 공동 작업을 하게 하며, 생산 방식과 제품 품질을 국가가 관리하고 감독하는 체계를 설계했다. 그는 이 모델을 ‘산업 공동체’라 불렀으며, 이는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실제 빈과 슈타이어마르크 지역에서 일부 시범 운영되었다. 그는 해당 모델을 통해 실업 문제를 해결하고, 생산성을 높이며, 자국 상품의 해외 경쟁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베허는 이러한 산업 공동체를 통해 수입을 줄이고 수출을 늘리는 중상주의 원칙을 적용하려 했다. 그는 프랑스의 콜베르 정책을 연구하고, 오스트리아 실정에 맞게 변형하여 적용했다. 특히 그는 철강, 섬유, 금속 가공, 화학 원료 등 전략 산업을 국가가 중심이 되어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해당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세금 감면, 기술 교육, 무역 규제 정책까지 구체적으로 설계했다. 이러한 정책은 당시 보수적인 귀족 계층에게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지만, 후에 오스트리아의 산업 기반을 형성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하게 된다.

상업 개혁과 과학을 결합한 국가경제 이론 정립

베허는 단지 산업 생산의 확대에만 관심을 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 오스트리아와 독일 지역의 상업 시스템 자체가 낙후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이를 개혁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과 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Politischer Discurs》라는 저서에서 국가가 상업과 과학을 결합한 경제 전략을 통해 부강해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책은 단순한 철학적 주장이나 이상이 아닌, 실제 정책 제안서와 같은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는 특히 상업 인프라의 과학화를 주장했다. 예를 들어, 도로 건설, 항구 운영, 무역 루트의 개선 등은 단순한 공공사업이 아니라 국가의 핵심 전략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했다. 그는 무역 노선과 통관 제도를 효율화하기 위해 국가 단위의 무역 통계 시스템을 제안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관세 정책, 통화 유통량 조절, 상품 가격 통제 등 일련의 경제정책을 구체적으로 설계했다.

또한 그는 경제학 이론뿐 아니라 초기 화학과 연금술 이론을 국가산업에 연결하려 했다. 그는 "자연의 원리는 국부(國富)의 근거다"라고 주장하며, 자연 과학적 이해를 통해 더 효율적인 생산 기술을 개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플로기스톤 이론(물질 연소 이론)을 제안하기도 했으며, 이는 후에 18세기 과학에서 한동안 큰 영향을 미친다. 그의 사상은 경제, 과학, 기술, 정책을 단일 체계로 보았으며, 이는 현대의 '산학협력'이나 '기술경제 정책' 개념의 기초로 이어졌다.

과학 기반 경제 정책의 선구자

요한 요아힘 베허는 생전에 끝내 제도화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사상과 정책 설계는 이후 수십 년간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근대적 경제 체계 정립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의 산업 개혁, 국가 주도 상공 정책, 기술학교 설립 등의 정책은 베허의 저서를 토대로 기획된 것이 많았다. 그는 당대에는 다소 급진적인 사상가로 여겨졌지만, 후대에는 실용 경제학과 국가 계획경제 이론의 선구자로 재조명받게 된다.

또한 그의 산업 공동체 개념은 19세기 독일에서 등장한 크라프트 협동조합, 기술전문학교, 국영 공장 설립 등의 제도에도 영향을 주었다. 과학과 경제를 통합하려 한 그의 사고방식은, 후에 독일식 공대 시스템과 경제기획형 행정 모델로 이어지며 기술국가 독일의 뿌리가 된다. 플로기스톤 이론은 과학사에서는 폐기된 이론이지만, 자연 현상을 경제적 기술로 전환하려는 그의 철학은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날 경제 정책, 산업 행정, 과학기반 생산 정책을 논할 때, 요한 요아힘 베허의 이름은 흔히 거론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제안했던 경제 기획 모델은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나라에서 ‘국가 산업정책’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베허는 단순히 지식을 나열한 학자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국가의 구조와 시스템을 다시 설계한 인물이었다. 그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그의 설계는 유럽 역사와 산업의 흐름 속에 조용히 스며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