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은 설계자

[역사의 숨은 설계자]14. 고려 건국 사상의 뿌리가 된 숨겨진 설계자-최치원(崔致遠)

diary52937 2025. 6. 30. 15:00

신라의 흔들리는 역사 (9세기말)

9세기 중반, 신라는 이미 300년 넘게 삼국을 통일한 국가로 존재하고 있었지만, 정치적 안정은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왕실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에 시달렸고, 지방에서는 호족(豪族) 세력이 독립적으로 성장하며 중앙의 권위는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특히, 진골 귀족 중심의 골품제도는 정치·사회·경제 모든 분야에서 성장과 개혁을 가로막는 제도적 벽이 되고 있었다.

당시 백성들은 세금과 부역에 시달렸고, 불교 권력은 사찰 중심으로 부를 독점하며 국가적 통합보다는 자기 이익에 치중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 전체를 새롭게 설계할 수 있는 철학과 행정적 방향이 절실히 필요했다. 유교적 합리주의, 개방적인 인재 등용 체계, 지방 분권에 대한 균형적 시각을 가진 사상가의 등장이 요청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신라 말 개혁안을 제시하며, 이후 고려의 사상적 뿌리가 되는 통치 철학을 남긴 인물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최치원(崔致遠, 857?~?)이다. 그는 단순한 문인이 아니라, 정치·제도·사상을 아우른 설계자였고, 당시에는 받아들여지지 못했지만 후대 국가들이 참고한 개혁의 밑그림을 설계한 숨겨진 디자이너였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시대를 앞서간 설계자

최치원은 신라 헌강왕 1년경인 857년,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중간 신분층이었으며, 골품제의 한계로 인해 국내에서는 높은 관직에 오르기 어려운 구조였다. 이에 그는 12세의 어린 나이로 신라를 떠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다. 이 유학은 단지 학문 수양이 아닌, 미래 개혁을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문장 실력과 학문 능력을 인정받아, 18세에 과거 급제에 성공하고, 이후 황소의 난(875~884년) 진압을 위한 격문 작성자로 발탁되며 당 조정의 눈에 띈다. 이 시기 그는 실무 행정과 위기 관리, 문서 제도에 대한 감각을 익혔고, 당나라 내의 유교적 행정 체계와 과거 제도, 중앙·지방의 균형 구조를 직접 목격했다.

약 30세경, 그는 신라로 돌아왔지만, 이미 국가는 급속히 붕괴 중이었다. 귀족 중심의 정치 구조는 변화에 완강히 저항했고, 최치원의 충언은 대부분 묵살되었다. 그는 결국 지방 관직을 전전하다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경남의 쌍계사 등에서 은둔하며 조용히 글을 쓰고 제자들을 교육한다. 그의 정확한 사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904년경을 전후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개혁안을 문서로 설계하다

최치원이 남긴 가장 중요한 설계는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라는 개혁 건의서였다. 이 문서는 신라의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고, 이를 바꾸기 위한 현실적인 대안을 조목조목 제시한 문서였다. 그는 이 문서에서 진골 귀족 중심의 정치 구조를 유교적 행정 시스템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신분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개방적 사회로의 전환을 제안한 것이다. 그는 관료 제도의 부패를 지적하며, 능력 중심의 인재 등용과 문치(文治) 원칙의 확립을 주장했다. 또한, 과거제를 도입함으로써 귀족 중심의 권력 구조를 타파하고자 했다. 이와 함께, 지방 호족의 무력적 자치가 아닌 유교 윤리에 기반한 자율적 향촌 운영을 제안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균형 있는 권력 분산 구조를 설계했다. 

 

그는 또 불교 세력의 과도한 재산 축적과 정치 개입을 비판하며, 불교를 신앙의 영역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단순한 종교 비판이 아니라, 정치와 종교의 분리, 권한과 역할의 명확한 구분이라는 현대적인 제안이었다. 또한 지방 호족을 단순히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제도 안으로 포섭하여 공동 통치를 설계해야 한다는 점도 언급했다. 중앙에서 임명한 관리와 지방 유력 인사가 협력하여 행정을 운영하는 모델은 후일 고려의 ‘사심관 제도’와 흡사한 구조이다.

그는 국가가 단지 물리적 통제 기구가 아니라, 문화와 도덕을 선도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이를 위해 유교적 교화와 문치(文治) 중심의 통치 철학을 강조했다. 이 모든 제안은 단순한 이념이 아니라, 행정적 시스템, 인재 등용 방식, 권력 배분 모델, 사회 통합 구조를 포괄하는 정치 설계도였다.

신라가 아닌 고려 초기 정치 사상에 영향을 준 숨겨진 설계자 최치원

문학 속에 남은 설계자의 흔적

비록 최치원의 개혁안은 신라 내부에서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진골 중심의 권력층은 변화를 거부했다. 하지만 그는 물러나면서도 자신이 겪은 현실과 이상을 문학과 사상으로 남겼다. 특히 「계원필경(桂苑筆耕)」, 「제왕연대력」, 「난랑비서문」 등의 저작은 통치 철학과 문화 이념, 국가의 방향성에 대한 기록으로 후대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난랑비서문」은 신라의 고유 사상인 화랑도 정신과 유교, 불교, 도교를 아우르는 통합 사상을 제시한 글로 평가받는다. 그는 이 글에서 삼교(三敎)의 조화를 통해 도덕성과 국가 정신을 새롭게 세우는 설계적 방향을 제시했으며, 이는 단순한 종교적 선언이 아닌, 다원적 사회 통합을 위한 철학적 기반이었다.

또한 그의 문장은 단순히 아름다운 글이 아니라, 역사, 행정, 윤리, 통치 철학이 담긴 사상적 선언문이었다. 그는 문장으로 정치를 말하고, 철학으로 구조를 설명했으며, 기록을 통해 국가 설계의 유산을 남겼다.

후대의 영향과 오늘날의 의미: 고려와 조선이 따른 설계 사상

최치원의 사상과 설계는 신라에서는 외면받았지만, 후대 국가들에게는 ‘이념적 설계도’로 계승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중앙과 지방의 균형 통치를 위해 ‘사심관 제도’를 만들었고, 유교를 행정 이념으로 채택하여 왕도 정치의 틀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최치원의 유교적 개혁 정신은 고려의 초기 정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성리학 중심의 관료제, 문관 중심의 통치 구조가 뿌리내렸고, 최치원의 저술과 사상은 정도전, 이이, 이황 등 조선의 학자들에게도 존중받았다. 그는 조선 성균관에서 가르쳐질 정도로 정치 철학의 선구자로 인정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지방 균형, 신분 철폐, 인재 등용의 이상형으로 거론된다.

오늘날 최치원은 단지 시문이 아름다웠던 문인이 아니라, 한 시대의 개혁을 설계하고, 그 철학이 후대 정치·행정·교육 체계의 사상적 기반이 된 설계자로 다시 조명받고 있다. 그는 정치적 성공은 하지 못했지만, 신라 말기의 지식인이 아니라, 삼국 통일 이후의 한반도 정치 사상에 지대한 족적을 남긴 이념적 창건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