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은 설계자

[역사의 숨은 설계자]8. 진시황의 법치국을 설계한 법가 실무자 -이사(李斯)

diary52937 2025. 6. 29. 23:54

중국 전국시대의 혼란과 진나라의 부상

기원전 3세기, 중국은 오랜 전쟁과 분열 속에 빠져 있었다. 각 지방에는 제각각의 왕국들이 존재했고, 말과 글, 법률, 화폐, 도량형까지 모두 달랐다. 이 시기는 ‘전국시대’라 불리며, 세력을 확장하려는 나라들 사이의 끊임없는 전쟁과 경쟁이 이어졌다. 바로 이 혼란의 시기에, 중국 서북부의 진(秦)나라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진나라는 군사력과 개혁 정책으로 눈에 띄게 발전하고 있었으며,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철학적 토대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그 토대가 된 사상이 바로 법가(法家)였다. 법가는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고 변화하기 어렵다고 보며, 사회 질서는 강력한 법과 권력으로만 유지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론으로만 존재하던 이 법가 사상을 실제 정치와 행정에 적용해 제국의 틀로 만든 인물이 바로 이사(李斯)였다. 그는 왕도 아니고 장군도 아니었지만, 진시황의 통일 국가를 설계하고 완성한 숨겨진 설계자였다.

중국 역사의 법치국을 설계한 실무자 이사

배움으로 자신의 삶을 설계하다. 

이사는 기원전 280년경, 중국 초나라(지금의 허난성 상차이)에서 태어났다.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닌 그는, 젊은 시절 지방 말단 관리로 일하면서 무능한 이들이 높은 자리에 오르고, 유능한 사람은 배제되는 현실에 분노했다. 그는 “나라가 혼란한 이유는 개인의 능력이 제대로 쓰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바꾸기 위해 법가 사상을 스스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법가의 핵심 사상가인 순자(荀子)에게 배움을 청했고, 이곳에서 함께 수학한 인물 중에는 한비자(韓非子)도 있었다. 이사는 순자에게서 인간은 본래 욕망을 따라 움직이므로, 이를 억제하려면 강력한 법과 통치가 필요하다는 현실주의 철학을 배웠다. 하지만 한비자처럼 원칙을 고수하기보다는, 정치 현실에 적용 가능한 실천 전략에 집중하는 쪽을 택했다.

수련을 마친 그는 진나라가 법가 사상을 적극 수용하는 개혁 국가라는 점에 주목해, 스스로 진나라로 떠났다. 그는 자신의 법가 이론을 바탕으로 작성한 정책 보고서를 진나라 조정에 제출했고, 이는 진왕(훗날 진시황)의 눈에 띄며 곧 궁정 고문으로 발탁되었다. 이후 그는 정치 전략, 외교, 행정, 조직 설계 등 진나라의 실무 전반에 개입하며 왕권을 실행 가능한 체계로 설계한 실무형 브레인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그는 후일 한비자를 진나라에 불러들이는 데도 관여했지만, 현실 정치에 적응하지 못한 한비자가 숙청당하는 과정에서도 철저히 전략적 현실주의자의 입장을 유지했다. 이사는 이미 이상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사람으로, 제국을 실제로 작동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설계자였다.

전략에서 설계로: 진 제국의 통일 정책을 현실로 만들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은 중국의 여러 나라를 통일하고 중국 역사상 첫 번째 중앙집권적 통일 제국을 세웠다. 그러나 통일 그 자체는 시작에 불과했다. 말과 글, 도량형, 법률, 행정 시스템이 제각각이었던 나라들을 하나로 통합하려면 세심하고 체계적인 국가 설계가 필요했다. 이사는 이 과정을 전면에서 주도하며, 진시황이 원하는 통일 국가의 행정적 토대를 직접 설계하고 실행에 옮긴 핵심 인물이 된다.

그는 우선 전국에 통일된 문자체인 ‘소전(小篆)’을 도입하고, 지역마다 다르던 도량형(길이, 부피, 무게의 기준)을 통일해 경제와 세금 시스템을 하나로 묶었다. 화폐는 원형 구멍이 있는 동전으로 통일했고, 각 지역에 파견되는 관리들이 동일한 양식으로 보고하고 명령받을 수 있도록 표준화된 공문서 체계를 만들었다. 또한 전국을 군현제(郡縣制)라는 형태로 재편해, 중앙이 각 지역을 직접 통제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사의 손에서 만들어진 이 행정 시스템은 중국 제국 체제의 기본 골격이 되었고, 이후 수천 년간 계승되었다.

법의 설계자: 법가 국가의 뼈대를 세우다.

이사는 법을 중심에 둔 나라 운영 방식을 확립했다. 그는 누구든 신분에 상관없이 법을 따라야 하며, 법을 어기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동시에, 위기 상황에서는 왕이 법보다 더 강한 결정을 내려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법과 권력의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실제로 나라가 돌아가게 만드는 방법을 설계한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사람들의 생각과 말까지 통제해야 나라가 흔들리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래서 진시황에게 사상의 통일 정책, 즉 『분서갱유』를 건의했다. 이것은 유학 책들을 불태우고, 말이 많던 학자들을 처벌한 조치였다. 당시로선 과격하고 무서운 정책이었지만, 짧은 시간 안에 나라 전체를 통제하려면 필요하다고 판단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이사는 행정, 법률, 사상까지 모두 연결해 하나의 통치 시스템으로 설계한 현실주의자이자 기술자였다.

 

- 분서갱유(焚書坑儒)는 진시황이 기원전 213년에 시행한 사상 통제 정책으로, 책을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생매장한 사건이다. 유가 경전과 역사서 등 수많은 고대 문헌이 소실되고, 고대 중국의 지식 체계가 크게 훼손되었다. 그러나 진나라 멸망 후 한나라에서는 유학이 다시 부흥하며, 분서갱유는 오히려 유학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중앙 집권 체제을 설계한 이사의 영향

이사는 진시황이 죽은 뒤, 왕실 안에서 벌어진 권력 다툼에 휘말려 기원전 208년경에 죽임을 당했다. 당시 정치 싸움은 매우 치열했고, 이사는 너무 많은 권한을 가졌다는 이유로 역모(반란 모의)의 누명을 쓰고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그러나 그가 만든 행정 제도와 통치 방식은 그가 죽은 뒤에도 계속 사용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군현제라고 불리는 제도였다. 군현제는 나라를 여러 지역으로 나누고, 왕이 직접 임명한 관리들이 지방을 다스리는 방식이다. 이사는 이 제도를 만들어 지방 세력을 줄이고 왕의 힘을 전국으로 퍼뜨릴 수 있게 했다. 이 제도는 진나라가 멸망한 뒤에도 한나라와 그 이후의 나라들에서 계속 쓰였다. 지금의 중국 행정구역 운영 방식도 이 군현제의 틀을 많이 따르고 있다.

또한, 이사는 문자와 돈, 무게 단위, 길이 재는 기준 등을 전국에서 하나로 통일시켰다. 덕분에 상인들이 어느 지역을 가든 같은 돈을 쓰고, 같은 규칙으로 무게를 재며, 같은 법을 적용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백성들의 삶을 단순하게 만들고, 나라 전체가 하나처럼 움직이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설계였다.

이사의 아이디어는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줬다. 조선 시대에도 『경국대전』이라는 나라의 법을 정리한 책을 만들어 행정을 운영했고, 일본도 중앙에서 모든 지역을 직접 다스리는 시스템을 만들 때 이사처럼 통일된 기준과 법을 중심에 두는 방식을 사용했다.

오늘날에도 법은 나라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이며, 정부는 여전히 표준화된 문서, 절차, 기준을 사용해 국민을 관리한다. 이런 행정의 기본 구조는 이사가 만들었던 체계와 매우 비슷하다. 이사는 전쟁을 하지 않았고, 무기를 들지 않았지만, 문서와 계획, 제도 설계만으로 나라 전체를 통일시킨 실무형 전략가였다. 그는 눈에 잘 띄지 않았지만, 제국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뒤에서 설계한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