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은 설계자

[역사의 숨은 설계자]18.대항해 시대를 설계하고 사라진 설계자-마르틴 아론소 핀손(Martín Alonso Pinzón)

diary52937 2025. 7. 2. 14:37

대항해 시대의 문을 연 역사, 그 이면의 설계자

15세기 후반, 유럽은 이제까지의 세계가 전부가 아니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중세가 막을 내리고, 르네상스가 피어나는 이 시기 유럽인들은 아시아와 인도를 향한 새로운 무역로를 찾기 위해 나서기 시작했다. ‘신항로 개척’, 즉 미지의 바다를 통해 새로운 대륙과 교역지를 찾으려는 꿈은 당시 스페인, 포르투갈 등 해양 국가들을 중심으로 번져갔다. 이 대항해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이는 단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항해’에는 결코 혼자서는 도달할 수 없었던 현장의 설계자들이 존재했다.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면서도, 역사 속에서 이름이 거의 사라진 인물이 있다. 바로 마르틴 알론소 핀손(Martín Alonso Pinzón, 1441?~1493)이다. 그는 콜럼버스와 함께 첫 항해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선단을 조직하고 선원들을 모으고 항로를 주도한 실질적인 항해 설계자였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명성 뒤에 가려진 채, 그는 대항해 시대의 서문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바다를 설계한 항해자의 성장기

마르틴 핀손은 1441년경 스페인 남서부의 항구 도시 팔로스 데 라 프론테라(Palos de la Frontera)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아버지를 따라 바다에 나갔고, 성인이 되기 전부터 지중해와 대서양을 오가는 숙련된 선장이자 해상 무역가로 성장했다. 그가 속한 핀손 가문은 지역에서 존경받는 선원 가문으로, 마르틴은 가문의 명성과 실력을 바탕으로 팔로스 지역 해양사회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항해와 선박 운영에 대한 실무 경험이 풍부했고, 풍향, 조류, 별의 위치를 바탕으로 한 자연 항법(Natural Navigation) 능력이 뛰어났다. 이는 지도나 나침반이 지금처럼 정밀하지 않던 시기에 실제 항로를 만들어내는 데 필수적인 역량이었다. 이런 마르틴 핀손에게, 콜럼버스라는 외지인의 모험 제안은 위험하지만 도전해볼 만한 기획이었다.

콜럼버스가 처음 항해 계획을 설명했을 때, 스페인 귀족들조차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마르틴은 그 가능성을 먼저 알아봤다. 그는 이 프로젝트가 실현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단순한 참여를 넘어 함대를 조직하고 자금을 보태며, 항해 자체를 함께 설계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대항해 시대를 실현한 현장의 설계자 마르틴 아론소 핀손

함대를 만들고 항로를 설계한 ‘현장의 설계자’

콜럼버스가 준비한 ‘신대륙 항해 프로젝트’는 왕의 허락을 받아냈지만, 막대한 비용과 실제 선단 구성, 선원 모집, 장비 준비는 다른 문제였다. 이 지점에서 마르틴 핀손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돈과 가문, 인맥을 동원해 선박 3척 중 2척(핀타호와 니냐호)을 마련했고, 자신이 직접 핀타호의 선장을 맡았다. 그의 동생 빈센테 야녜스 핀손도 함께 항해에 참여했다.

그는 항해에 필요한 물자와 식량, 무기, 경험 많은 선원들을 확보했으며, ‘콜럼버스는 꿈을 꾸었고, 마르틴은 그것을 실현했다’는 말이 생겨날 만큼 실제 항해 준비를 주도한 인물이었다. 항해 도중에도 그는 풍향과 해류를 판단하여 보다 남쪽 항로를 선택하도록 콜럼버스를 설득했으며, 이는 첫 항해에서 목적지에 도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492년 10월 12일, 배들이 도착한 그 섬은 오늘날의 바하마 제도에 속하는 구아나하니(산살바도르)로 추정된다. 이 항해는 세계 지도를 바꿔놓았고, 콜럼버스는 ‘신대륙 발견자’로 불리게 된다. 그러나 그 여정의 실제 진행자이자 설계자였던 마르틴 핀손의 이름은 그 공로만큼 기억되지 않았다.

갈등과 소외, 그리고 조용한 퇴장

항해가 성공한 뒤, 콜럼버스와 마르틴 핀손의 관계는 점점 멀어졌다. 항해 도중의 판단 차이, 귀국 후의 공로 인정 문제 등 여러 이유로 둘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과 갈등이 생겼다. 핀손은 항해 중 일부 기간을 콜럼버스와 따로 행동했으며, 이는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서 ‘독단 행동’으로 비칠 여지가 있었다.

또한 콜럼버스는 귀국 후 왕실에서 공식적인 항해의 성공자이자 독점적 보고자로 인정받았고, 마르틴 핀손은 별다른 포상 없이 조용히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항해에 직접 돈을 대고, 선단을 이끌었으며, 방향을 제시한 사람이었음에도 그의 기여는 콜럼버스의 그늘에 묻혀버린 것이다.

그는 귀국 후 병에 걸려 1493년 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이름은 일부 선원들의 기록에만 조용히 남아 있었고, 역사의 공식 서술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그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그가 없었다면 그 항해도 없었을 것이라 입을 모았다. 그는 역사 앞에서는 조용했지만, 역사의 이면에서는 분명한 실무형 설계자였다.

설계자의 유산은 바다 위에 남다

마르틴 핀손은 왕이 아니었고, 탐험가로 공식 기록된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대항해 시대를 가능케 한 초기 설계자 중 한 명이었다. 그가 만든 선단, 그가 판단한 항로, 그가 모집한 선원들 없이는 콜럼버스의 항해도 이루어질 수 없었고, 대서양의 항로도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콜럼버스가 세계지도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면, 마르틴 핀손은 그 지도를 처음 그릴 수 있게 만든 실제 도구와 길을 마련한 디자이너였다. 그는 칭송보다 실천을 택했고, 이름보다 결과를 중시했던 항해자였다. 오늘날 스페인의 일부 항구 도시에서는 그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고, 역사학자들은 점점 그의 공로를 재조명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역사에는 영웅의 이름이 드러나지만, 그 영웅의 길을 만든 숨은 설계자들이 존재한다. 마르틴 핀손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이름은 역사서의 가장자리에 있을지 몰라도, 그가 만든 길은 대서양의 물결 위에 분명히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