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은 설계자

[역사의 숨은 설계자]62.바오 스천(包世臣): 청나라 말기 혼란에서 빛난 실용 개혁가

diary52937 2025. 7. 20. 03:01

격동의 청나라, 사상적 전환을 부르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중엽에 이르는 중국은 청나라의 통치가 구조적으로 약화되며 내적 위기를 겪던 시기였다. 내부적으로는 백련교의 난과 같은 민란이 끊이지 않고, 인구 증가로 토지 부족과 농민 빈곤 문제가 심각해졌다. 건륭제 말기부터 제국의 행정 시스템은 점점 더 부패와 비효율에 물들었고, 관료 계층은 형식적인 성리학적 해석에만 의존하며 현실 문제에 대한 대응 능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조세제도, 수리(水利), 국방, 인재 선발 등 실무 행정에서 지식과 실천의 괴리가 점차 커졌다.

이 시기는 또한 서양 열강의 접근과 상업의 확대로 인해, 전통적 가치관과 외부 변화가 충돌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아편 전쟁(1839~1842)은 그 절정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전통 문명과 외래 세력이 부딪히는 이 시점에서, 학자들과 지식인들은 성리학적 교조주의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등장한 바오 스천은 학문은 실천을 위해 존재해야 하며, 사대부의 본질은 '입헌(立言)'보다 '입업(立業)'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중국 전통 학문의 실용성 회복과 사상적 전환을 촉진한 인물로 부상하였다.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은 실용 지식인

바오 스천은 1775년, 청나라 강소성 단양현(丹陽縣)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경전 해석뿐 아니라 지리, 수리(水利), 농업, 서법(書法) 등 다방면에 걸쳐 관심을 가졌다. 그는 과거 시험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실무와 현실에 기반한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지역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는 농촌 경제의 현실을 직접 체험하며, 농업 생산력 증대와 농민 생활 개선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염정(鹽政)개혁과 같은 실제 행정에 참여하여 실무 경험을 쌓았다.

특히 그는 조세행정과 수리사업, 문서 작성과 제도비평에 탁월한 감각을 보였고, 지방 관리로 임명되어 수차례 치수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는 고위직에 오른 관료는 아니었으나, 지방 실무에서 학문과 행정을 통합한 대표적 지식인이었다.

그는 평생에 걸쳐 형식적인 학문보다는 현실 행정을 개선하는 데 학문이 기여해야 한다는 철학을 유지하였다. 특히 말년에 그는 글씨와 서법 이론에 집중하며, 서법도 단순한 미학이 아니라 철학적 사고와 실천을 반영해야 한다는 독특한 주장을 전개했다.

그는 1855년, 8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한 세기에 가까운 그의 생애는, 전통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중국의 사고 변화를 반영하는 거울과 같았다.

청나라 역사에 실용적 행정비평과 서법 이론의 근대화

바오 스천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은 ‘실용적 개혁주의 사상’의 형성이다. 그는 《징차이(靖蔡)》, 《중설(中說)》, 《의정부책(議政簿策)》 등에서 당대 관료체제의 비효율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행정은 '도(道)'보다 '기(技)'를 중심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대 성리학자들이 지나치게 추상적 이론에 집착한다고 비판하며, 고증학이 아니라 실무에서 검증된 지식이 진정한 ‘실학(實學)’의 길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수리 행정과 농업 기술, 조세 집행 방식에 대해 구체적인 개선안을 제시했으며, 현장 중심적 사고를 강조했다.

그의 또 다른 업적은 서법(書法) 이론의 철학적 재해석이다. 그는 서예를 단순한 예술로 보지 않고, 인격 수양과 국가 경영의 정신을 드러내는 도구로 간주했다. 그는 서체에서 감정과 논리의 균형, 격조와 실용의 조화를 추구하며, 특히 옛법을 답습하는 서예계의 경향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비석에 새겨진 글씨체은 북위비(北魏碑) 를 연구하여 '비학 (碑學) '을 집대성했다. 

그는 자신의 필법을 통해 예술의 형식을 통해 현실의 질서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고, 이는 후대 중국 서법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사상은 미술뿐 아니라, 문학과 정치, 교육 전반에 파급력을 가졌다.

격동의 청나라 경세치용사상을 바탕으로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은 실용 개혁가 바오 스천

청 말기 행정 개혁 사상의 토대 마련

바오 스천의 사상과 실천은 주로 강소성·절강성 일대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그는 중앙 정부의 고위직은 아니었으나, 그의 글과 실무 경험은 지방 관료와 학자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고, 특히 지방행정의 개선과 실학의 복원이라는 두 측면에서 지역 개혁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그의 저작은 후대 개혁사상가들—특히 공양학(公羊學) 계열 실학자들, 그리고 장지동(張之洞), 캉유웨이(康有為) 등 청 말기 신사대부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그는 '사대부는 도리를 말할 뿐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돌려세우며, 말과 글의 권위보다 실무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사고는 후기 청조가 서구식 개혁을 도입하기 전, 내부 자생적 개혁 사상을 성립시키는 토대가 되었고, 나중에 펼쳐질 양무운동, 신정개혁(新政改革), 심지어 중화민국 초기의 행정 개혁 사상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서법 이론에 있어 그의 철학은 전통예술이 단순히 과거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구성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현대적 접근을 보여주었고, 이는 중국 회화, 서예, 인문학 전반의 자기 성찰로 이어지는 문화적 충격을 제공했다.

실천적 개혁을 추구한 조용한 설계자

오늘날 바오 스천은 중국 지식사에서 과소평가된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그는 가오위(高位)를 누린 정치인은 아니었고, 국가급 정책을 직접 주도한 개혁가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글과 사고는 실용주의와 도덕주의 사이의 균형을 찾으려 했던 초기 근대 지식인의 전형으로 평가된다.

일부 학자들은 그를 ‘중국적 실용주의 정치철학의 창시자’로 간주하며, 그의 주장은 서양 자유주의적 합리성과도 접점을 찾을 수 있다고 평가한다. 반면, 그의 비판이 당대 성리학적 구조에 근본적으로 도전하지는 못했다는 한계도 지적된다. 그는 제도를 뒤엎는 급진적 사상가가 아니라, 체제를 내부에서 수정하려는 점진적 개혁론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점에서 오히려 현실과 이상 사이를 조율하며 작동 가능한 개혁을 구상한 실천적 설계자였다고도 볼 수 있다.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면, 그의 서법 이론 역시 단순한 미학 이론을 넘어, 문화예술이 어떻게 사회질서와 결합될 수 있는지를 고민한 초기 철학자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