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은 설계자

[역사의 숨은 설계자]38. 니콜라 르블랑(Nicolas Leblanc)_화학 생산 시스템의 설계자

diary52937 2025. 7. 10. 12:41

산업화 역사의 태동

18세기 후반의 유럽은 산업화 직전의 격동기였다. 영국에서는 섬유 산업과 증기기관을 중심으로 산업혁명이 태동하고 있었고, 프랑스 역시 기술과 생산 방식의 근본적 혁신을 준비 중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전통적인 수공업 중심 경제에서 국가 주도의 제조 산업 체계로 전환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특히 화학 산업은 군수, 농업, 섬유, 유리 산업 등 모든 분야와 연결되어 있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분야였다.

이 시기 프랑스는 소금, 알칼리, 비누, 염료, 유리 등 생활과 산업 전반에 필수적인 자재를 외국에서 수입하고 있었고, 이는 막대한 비용과 외교적 종속을 초래하고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이를 해결하고자 자국 내에서 화학 원료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기술과 구조를 요구했고, 이런 국가적 요구 속에서 과학과 기술을 현실 산업 구조에 접목시킨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단순한 발명가가 아니었다. 그는 기술을 경제 구조로 전환하는 공정 설계자였으며, 화학이 과학을 넘어 국가 산업의 중심이 되는 구조를 만든 역사 설계자였다. 그의 이름은 니콜라 르블랑(Nicolas Leblanc)이다.

과학을 구조로 전환한 기술자의 생애 

루이 르 블랑은 1742년 프랑스 파리 인근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어린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의사였던 후견인 밑에서 자라 의학과 화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파리 외과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해 외과의로 활동했으며, 1780년에 오를레앙 공작의 주치의가 되어 경제적 안정을 얻게 된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화학 실험과 응용 과학에 대한 높은 흥미와 기술적 이해를 보였다. 그는 공업화와 과학기술의 실용화를 강조하던 계몽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이론과 실험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기술자로 성장했다.

1770년대 중반, 프랑스 정부는 자국의 군수 및 공업에 필수적인 탄산나트륨(sodium carbonate, soda ash)을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 생산하기 위한 기술 공모를 실시하였다. 당시 탄산나트륨은 유리 제조, 비누 생산, 제지 공정 등에서 꼭 필요한 원료였고, 대부분은 이탈리아 또는 스페인으로부터 수입하고 있었다.

1789년, 르 블랑은 자신이 개발한 ‘르블랑 공정’을 프랑스 아카데미와 정부에 제출한다. 이 공정은 소금(염화나트륨) → 황산반응 → 탄산나트륨 생성이라는 세 단계를 통해 저렴하고 안정적인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만든 기술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이 공정을 채택하였고, 르 블랑은 루이 16세로부터 공식 특허와 지원을 받게 된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1789) 으로 후원자인 오를레앙 공작이 처형되고, 공장은 국가에 몰수되며 특허도 박탈당한다.

프랑스 정권이 바뀌며 그는 명예도 받지 못하고, 경제적 보상도 받지 못해 파산을 겪게 된다. 결국 1806년 1월 16일, 극심한 빈곤과 우울증으로 구빈원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화학을 생산 시스템으로 현실화한 니콜라 르블랑

 

화학을 생산 시스템을 설계하다

르 블랑이 설계한 ‘르블랑 공정(Le Blanc Process)’은 단순한 화학 반응을 넘어서, 화학 원료를 공장에서 대량 생산할 수 있도록 시스템화한 최초의 기술 중 하나였다. 그는 먼저 염화나트륨(NaCl)에 황산(H₂SO₄)을 반응시켜 황산수소나트륨을 만들고, 여기에 석회석과 탄소를 가해 가열하는 방식으로 탄산나트륨(Na₂CO₃)을 얻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 공정은 19세기 초까지 유럽 대부분의 화학 공장에서 표준적인 제조 방식으로 채택되었고, 이후 화학 산업의 기계화와 자동화를 가능하게 만든 기반이 되었다. 이는 단순한 실험이 아닌, 화학을 산업으로 전환시킨 구조 설계였으며, 산업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체계화한 설계 능력에 있었다. 그는 필요한 반응 온도, 시간, 장비 설계, 재료 투입량, 부산물 처리 방식까지 하나의 구조로 정리하였고, 이를 통해 공장 단위에서 반복 생산 가능한 화학 시스템을 완성했다. 그의 공정은 프랑스를 비롯해 영국, 독일 등 유럽 전역에 확산되었으며, 19세기 중반까지 화학산업의 표준 생산 방식으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 공정은 중대한 환경 문제를 동시에 야기했다. 제조 과정에서 염화수소(HCl) 가스가 대기 중으로 배출되었고, 부산물로는 황산칼슘(CaSO₄, '갈색 슬러지')가 수천 톤씩 발생했지만 처리 기술은 미비했다. 이로 인해 공장 주변 대기와 수질, 토양이 심각하게 오염되었으며, 노동자들의 건강도 위험에 노출되었다. 결국 이러한 문제는 르 블랑 공정의 미래를 결정짓게 된다.

이후 나중에 등장한 솔베이 공정이 르블랑 공정을 대체했지만, 근대 산업화 초기의 화학 생산 구조는 르 블랑이 만든 형식을 따랐다

기술에서 국가 전략으로, 그리고 환경으로

르 블랑은 단순한 실험가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공정을 국가 전략의 일부로 편입할 수 있도록 기획했으며, 공장 구조, 장비 배치, 노동 인원 구성, 비용 계산까지 포함된 설계도를 정부에 제출했다. 이는 단순한 발명이 아니라, 국가가 기술을 생산 기반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한 산업 설계 행위였다.

그는 자신의 공정이 프랑스의 자립적 산업 구조를 만드는 데 기여하리라 믿었고, 실제로 한동안 프랑스는 유리, 비누, 섬유, 제지 산업 등에서 상당한 수입 대체 효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 설계는 환경과 인간의 건강이라는 중요한 변수 앞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당시 기술 수준에서는 부산물 정제나 공해 억제가 불가능했고, 결국 사회적 비판과 환경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19세기 후반, 벨기에의 에른스트 솔베이(Ernest Solvay)는 보다 경제적이고 환경적으로 우수한 탄산나트륨 제조 공정, 즉 솔베이 공정(Solvay Process)을 개발한다. 이 공정은 이산화탄소와 암모니아를 활용한 폐기물 없는 순환 구조를 제공했으며, 르블랑 공정은 점차 역사 속으로 퇴장하게 된다.

기술 설계자의 비극과 산업 구조의 교훈

르 블랑의 공정은 비록 사라졌지만, 그가 만든 구조화된 생산 시스템현대 화학공정 설계의 출발점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과학 지식을 산업 구조로 연결했고, 하나의 기술이 국가의 전략 자산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는 동시에, 기술 설계가 환경과 사회적 책임을 동반해야 한다는 교훈도 남겼다.

르 블랑 공정은 이후 수십 년간 산업혁명을 견인했지만, 공장 주변 주민들의 피해와 환경 파괴 문제로 인해 결국 역사에서 퇴장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실패를 통해 공정 설계에서의 지속가능성, 안전성, 환경적 책임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는 오늘날 그린 '케미스트리(green chemistry)'의 윤리적 기반이 되었다.

르 블랑은 살아생전 인정받지 못했고, 그의 이름은 거의 사라졌지만, 기술자와 설계자의 사회적 위치와 역할을 재정의한 인물이었다. 그는 실험실에 머무르지 않고, 기술을 구조로 만들었으며, 그 구조를 국가와 산업의 뼈대로 전환하려 했던 역사 속의 시스템 설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