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은 설계자

[역사의 숨은 설계자[76.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 핵에너지를 과학적으로 해석한 구조의 설계자

diary52937 2025. 7. 26. 23:44

군사 기술로 변환되는 양자역학의 시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는 물리학의 혁명이 일어난 시대였다. 뉴턴의 고전역학은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플랑크의 양자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보어의 원자 모형,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 등으로 물질의 근본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시도가 확산되었다. 이러한 물리학의 발전은 자연스레 원자의 내부 구조와 에너지 방출 메커니즘으로 관심을 옮기게 했고, 핵물리학(nuclear physics)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태동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는 과학이 정치와 점차 얽히기 시작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지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세계는 기초과학이 군사기술로 변환되는 문턱에 서 있었다. 원자력이라는 새로운 에너지원은 이론적 가능성을 넘어서 군사적, 정치적, 윤리적 의미를 가진 기술로 전환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이 지점에서 ‘핵분열(fission)’이라는 개념의 실마리를 제공한 인물이 바로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였다.

그러나 당시 유럽은 나치즘의 그림자 아래 반유대주의와 여성 차별이 극심했고, 유대계 오스트리아인 여성 과학자였던 마이트너는 그러한 구조 속에서 수많은 차별과 배제를 경험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과학적 진실을 포기하지 않았고, 물리학과 윤리 사이의 균형을 설계한 ‘숨은 설계자’로 남게 된다.

20세기 초 차별속에서 핵에너지를 과학적으로 해석한 구조의 설계자 리제 마이트너

차별을 넘어 과학의 본질을 추구한 물리학자의 여정

리제 마이트너는 1878년 11월 7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대계 가정에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는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으나, 그녀는 독학을 통해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했고, 1901년 비엔나 대학교에 입학해 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최초의 여성 중 한 명이 되었다.

이후 독일로 건너간 마이트너는 막스 플랑크의 조교로 활동하며, 물리학의 중심부에 합류하게 된다. 1907년에는 화학자 오토 한(Otto Hahn)과 함께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에서 방사능과 원자 핵 분열 실험을 진행하며 30년 이상 공동 연구 파트너로 활동한다. 특히 그녀는 실험적 데이터 해석, 중성자 충돌 이론, 핵의 질량-에너지 변환 문제 등에 깊이 관여했다.

그러나 1938년 나치의 유대인 박해가 본격화되면서, 마이트너는 독일을 탈출해 스웨덴으로 망명해야 했다. 그해 겨울, 오토 한은 마이트너 없이 핵분열 실험을 진행해 우라늄 원자가 바륨과 크립톤으로 쪼개진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 원리를 해석하지 못했고, 스웨덴에 있는 마이트너가 조카 오토 프리슈(Otto Frisch)와 함께 이 결과를 이론적으로 해석해 ‘핵분열(fission)’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명명하고 설명했다.

1944년, 오토 한은 노벨 화학상을 단독 수상하게 되며, 마이트너의 공로는 공식적으로 배제된다. 마이트너는 이에 대해 직접 항의하지 않았지만, 동료 과학자들과 후대 학자들은 이를 과학사에서 가장 논란 많은 공로 누락 사례로 평가하게 된다. 이후에도 그녀는 핵분열의 발견으로 인해 발생한 핵무기의 개발에 대해 깊은 고뇌를 했으며, 평생 핵무기 사용에 반대했다. 스웨덴과 영국에서 물리학 연구와 교육에 헌신했고, 1968년 10월 27일,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89세로 조용히 별세했다.

핵분열 이론의 과학적 해석을 설계하다

마이트너의 가장 핵심적인 과학적 업적은 핵분열(nuclear fission)이라는 자연 현상의 물리적 원리를 최초로 이론화했다는 점이다. 오토 한이 실험을 통해 우라늄 원자가 바륨으로 분열된다는 데이터를 확보했을 때, 마이트너는 이 실험 결과를 해석하는 데 필수적인 질량-에너지 변환 법칙(E=mc²)을 도입해, 분열 과정에서 막대한 양의 에너지가 방출된다는 사실을 계산해냈다.

그녀는 조카 오토 프리슈와 함께 1939년 공동 논문을 발표하며 ‘핵분열(fission)’이라는 개념을 세계 최초로 정의하고 이론화했으며, 이는 곧바로 핵에너지 이용 기술과 원자폭탄 개발의 이론적 출발점이 된다. 그들은 분열된 원자핵이 계속해서 다른 원자핵을 분열시키는 연쇄 반응(chain reaction)을 유도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으며, 이는 핵무기의 기반이 된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발견이 무기로 전용되는 것에 강한 윤리적 거부감을 표명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참여 요청도 거절했고, 원자폭탄이 일본에 투하된 후에는 “나는 그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입장을 강하게 밝혔다. 이러한 행보는 그녀가 단지 과학의 구조를 해석한 이론가가 아니라, 과학의 윤리적 방향까지 고민한 설계자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마이트너는 여성으로서, 그리고 유대인으로서 불리한 환경 속에서도 실험물리학, 이론물리학, 방사능 연구 등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통합 능력을 발휘했으며, 여성 과학자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과학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물리학, 과학윤리, 여성과학자 롤모델로서의 영향력

마이트너의 연구는 이후 핵물리학과 원자력 공학, 방사선 치료, 에너지 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핵심적인 기반이 되었다. 핵분열 개념은 오늘날 원자력 발전소의 원리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는 세계 에너지 구조와 산업 구조에도 장기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또한 그녀의 삶은 과학윤리 교육의 대표적 사례로도 활용된다. 과학자가 사회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 그리고 과학이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방향으로 이용될 때 연구자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윤리적 딜레마를 상징하는 인물로 자리잡았다.

그녀는 수십 년간 과학계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실험실 출입이 제한되고, 이름이 공동저자에서 빠지고, 연구 성과가 가려지는 구조를 직접 경험했지만, 이에 굴복하지 않고 차분히 과학으로 응답한 롤모델이 되었다. 오늘날 여성과학자협회, 과학사 연구회, STEM 교육 프로그램에서 그녀는 과학의 보이지 않는 장벽을 넘어선 첫 세대 중 한 명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과학적 진실을 위한 설계자, 역사의 이름을 되찾다

리제 마이트너는 사후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1960년대 이후 그녀의 업적은 과학사 연구자들에 의해 복원되었고, 유네스코와 미국 물리학회, 독일 막스 플랑크 협회 등에서 그녀의 공로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1997년에는 미국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에서 발견한 원소 109번에 ‘마이트네륨(Meitnerium, Mt)’이라는 이름을 부여, 과학사에 그녀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남겼다.

오늘날 그녀는 여성과학자의 상징일 뿐 아니라, “과학은 진실이어야 한다”는 신념을 끝까지 지킨 과학윤리의 아이콘으로 남아 있다. 그녀의 삶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남긴다:

“누가 과학을 만들었는가?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과학의 설계자가 아니었는가?”

리제 마이트너는 무대 위에 이름은 없었지만, 핵에너지를 과학적으로 해석한 구조의 설계자, 그리고 과학과 윤리가 함께 갈 수 있음을 증명한 역사의 숨은 설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