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은 설계자]73. 레프 트로츠키(Lev Trotsky)-사회주의 원형을 지키고자 했던 양심적 사상가
제국의 몰락과 혁명의 불씨 속에서 설계된 새로운 질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러시아 제국은 거대한 내부 모순 속에 놓여 있었다. 제정 체제는 농노 해방 이후에도 계급 구조를 견고히 유지했으며, 산업화는 도시 노동자층을 급속도로 확대시키면서 사회적 긴장을 증폭시켰다.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아나키즘 등 다양한 사상이 대립했고,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은 국가의 피로도를 한계치까지 끌어올렸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이 연이어 발생하며 제정 체제가 붕괴되고,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혁명의 조직, 군대의 설계, 권력의 구조화를 이끈 이들이 있었고, 그 중 가장 전략적 사고로 구조를 설계한 인물이 바로 레프 트로츠키(Lev Trotsky)였다.
그는 단지 정치 이론가가 아니었다. 트로츠키는 권력 이전의 구조를 기획하고, 전시상황 속에서 적군을 조직하고, 혁명을 방어하기 위한 전술을 설계한 행동하는 사상가였다. 후에 스탈린주의에 의해 추방되고 암살당하지만, 그가 남긴 전술적 유산과 조직 전략은 지금도 많은 급진 정치 이론의 기초로 남아 있다. 트로츠키는 확실히 역사라는 무대의 전면에 서지 못했으나 무대를 준비한 숨은 설계자였다.
암살로 끝난 혁명가의 삶
트로츠키는 1879년 11월 7일, 현재 우크라이나 영토인 얀노프카의 유대인 지주 가정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슈테인(Лев Давидович Бронштейн)이며, 청소년기부터 정치적 저항에 가담해 제정 러시아에 의해 체포되었고, 시베리아 유형을 겪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트로츠키’라는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05년 러시아 1차 혁명 당시 그는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소비에트 의장으로 활약하며 급진 좌파의 중심 인물로 떠오른다. 이후 레닌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고, 1917년에는 볼셰비키에 정식 합류해 10월 혁명의 핵심 기획자이자 실행자로 활약했다. 특히 그는 붉은 군대(Red Army)를 창설하고 조직하여, 혁명 이후의 내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레닌 사망 이후 권력 투쟁이 벌어지면서, 트로츠키는 스탈린과의 갈등 속에 점차 정치적 입지를 잃는다. 1927년 당에서 축출되고, 이후 망명길에 올라 터키, 프랑스, 노르웨이 등을 거쳐 멕시코로 망명한다. 망명 중에도 그는 스탈린 체제를 비판하고, 제4인터내셔널(1938년 창설)을 조직하며 국제 좌파 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스탈린의 분노를 불러왔고, 결국 1940년 8월 20일, 멕시코시티 자택에서 소련 비밀경찰이 보낸 라몬 메르카데르에 의해 암살당한다. 그는 머리에 얼음송곳으로 치명상을 입고 이틀 후 사망했다. 죽음은 그의 활동을 멈췄지만, 그가 설계한 정치적 사고와 혁명의 구조는 살아남았다.
혁명의 조직자, 군대의 창시자, 세계혁명의 설계자
트로츠키의 가장 눈에 띄는 업적은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권력 탈취 전략과 구조 설계에 있다. 그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와 볼셰비키 당 간의 전략적 연결을 담당하며, 혁명군의 진로, 군사 배치, 커뮤니케이션 체계 등을 설계해 실질적인 무장 봉기의 성공을 이끌었다. 특히 그는 말로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를 기획하는 조직가의 역할에 집중했다.
또한 트로츠키는 붉은 군대(Red Army)의 창시자이자 최고사령관으로, 제정 잔당과 백군, 외세의 개입 등과의 내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그는 병사 교육, 사령부 조직, 전략 전술, 심지어 병사 복지에 이르기까지 군대의 모든 요소를 설계하며 혁명 이후 체제 유지를 위한 핵심 도구를 마련했다.
이론가로서의 트로츠키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영구혁명(permanent revolution)’ 이론을 통해, 러시아 혁명이 고립되어선 안 되며, 세계적 혁명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는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이론과 정면 충돌하였으며, 이후 제4인터내셔널 창설로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언론과 선전의 중요성을 일찍이 인식해 신문 《프라우다》와 《노비 푸트》의 편집에 관여했고, 방대한 저작을 통해 혁명가의 언어, 지식, 대중 소통 방식을 설계했다. 그는 단지 글을 쓴 철학자가 아닌, 실제로 혁명을 기획하고 실행한 설계자였다.
국제사회주의 운동의 구조를 만든 전략가
트로츠키는 단지 러시아 내부의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혁명을 수출할 전략을 고민한 세계사회주의 운동의 국제 설계자였다. 그가 창립한 제4인터내셔널(1938)은 기존 제2·제3인터내셔널과 달리, 스탈린주의의 권위주의와 민족주의 경향을 배격하고, 국제적 연대와 자율적 혁명을 중시했다.
그의 사상은 전후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아시아의 좌파 지식인과 활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사르트르, 멕시코의 레온 블룸, 미국의 시절 좌파 잡지들과 청년운동 모두 트로츠키의 유산을 일정 부분 계승하거나 반응했다. 특히 라틴아메리카의 게릴라 운동과 1968년 유럽의 학생운동은 트로츠키의 ‘항구적 저항’ 정신을 직접적으로 반영했다.
또한 트로츠키는 ‘민주적 중앙집중제’의 문제점, 관료주의의 자가 증식, 국가폭력의 도구화에 대해 일찍이 경고하며, 후일 동구권 몰락과 스탈린주의 비판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 때문에 많은 현대 사회주의자들은 그를 ‘좌파 내부의 양심’이자 ‘운동의 비판적 설계자’로 간주한다.
실패한 지도자인가, 양심적 사상가인가
트로츠키는 역사에서 복잡한 위치에 놓여 있다. 한편으로 그는 스탈린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한 실패한 지도자로, 다른 한편으로는 스탈린주의가 왜곡한 사회주의의 원형을 지키고자 한 양심적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특히 1990년대 소련 붕괴 이후, 트로츠키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나의 인생(My Life)’, ‘배신당한 혁명(The Revolution Betrayed)’ 등 20세기 혁명사에서 가장 논쟁적이며 실천적이었던 이론가, 정치가로 평가 받는다.
비판 역시 존재한다. 트로츠키는 혁명 과정에서 ‘적들을 총살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테러와 강압을 정당화했으며, 일부 내전기 기록에서는 인권 침해 논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구조가 영구적이 되어선 안 된다고 주장하며, 혁명 그 자체의 자기 비판 가능성을 열어둔 사상가였다.
오늘날 그의 사상은 사회주의뿐 아니라, 사회운동, 조직 전략, 권력 비판 구조 설계의 이론적 자산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역사는 나를 정죄할 것이다. 하지만 그 역사를 나는 준비했다.”
트로츠키는 권력을 잡지 못했지만, 혁명이라는 체제를 구성한 숨은 설계자로서 현대 정치사에 분명한 흔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