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은 설계자]53. 토머스 클락슨 (Thomas Clarkson)_인권운동의 기본 설계도를 남긴 역사적 시민
경제와 윤리 사이에서 갈등하던 제국의 그림자
18세기 후반의 영국은 산업혁명과 해상 무역의 성공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고, 세계 최강의 제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성공 이면에는 노예무역이라는 비윤리적 기반이 자리잡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데려온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카리브해, 미국, 남미의 플랜테이션에서 무급 노동력으로 활용되었고, 그 생산물은 다시 유럽으로 수출되어 산업과 금융의 원천이 되었다.
노예선은 영국의 항구를 출발해 아프리카에서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신대륙에서 당밀, 면화, 설탕 등을 싣고 돌아오는 ‘삼각 무역(Triangle Trade)’ 구조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창출했다. 하지만 점차 계몽주의, 기독교 윤리, 자유주의 철학이 확산되며 노예제도의 비인간성과 모순에 대한 비판이 영국 사회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노예무역을 반대하는 시민운동과 정치 운동이 서서히 태동하기 시작했다. 이 흐름의 중심에서 가장 적극적이고 체계적으로 노예무역 폐지를 위한 전략과 실천을 설계한 인물이 바로 토머스 클락슨(Thomas Clarkson)이었다. 그는 감정이나 주장보다 정보와 데이터, 구조적 설계와 캠페인 전략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인물이었다.
신앙과 이성이 결합된 양심의 실천가
토머스 클락슨은 1760년 3월 28일, 영국 케임브리지셔(Cambridgeshire)의 위스비치(Wisbech)에서 성공회 사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서 공부하며 문학과 철학에 깊은 조예를 쌓았으며, 당시 지식인 계층 내에서 유행하던 계몽주의 사상과 기독교 인도주의를 동시에 받아들였다.
그의 인생 전환점은 1785년, "타인의 의사에 반해 노예로 삼는 것이 합법인가?"라는 주제로 라틴어 에세이를 쓴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 글은 케임브리지 대회에서 수상하며 주목을 받았고, 그는 이 과정에서 노예무역의 실태에 대해 깊이 조사하게 된다. 이 에세이는 1786년 영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고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조사한 실제 증언과 통계, 고문 도구, 노예선 구조는 그를 강하게 자극했고, 그는 이를 단순한 학문적 주제가 아닌 삶의 과제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는 이후 노예무역 폐지 운동에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
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노예 제도의 비인간적 실태와 영국 산업의 윤리적 모순을 폭로하는 강연과 자료 배포를 이어갔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1786년 '인간 종의 노예제와 산업에 관한 에세이(An Essay on the Slavery and Commerce of the Human Species), 1808년 "아프리카 노예무역 폐지의 역사' 등이 있다.
그는 1846년 9월 26일, 86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인권운동의 최전선에 있었고, 영국의 노예무역이 공식 폐지된 이후에도 실질적 노예 해방을 위해 후속 활동을 이어갔다.
노예무역 폐지를 위한 설계
토머스 클락슨은 노예무역 폐지 운동을 감정적 호소, 구호 중심의 운동이 아닌 증거 중심의 실천 운동으로 실천하였다. 그는 1787년 ‘노예무역 폐지 협회(The Society for Effecting the Abolition of the Slave Trade)’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며 조직적인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의 전략은 간단하면서도 강력했다. 노예선 내부 구조, 족쇄, 채찍, 무역 장부, 노예들의 인터뷰 등 방대한 실물을 수집해 전국을 돌며 전시하고, 이를 통해 일반 시민과 정치인들에게 시각적·정서적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는 2만 마일 이상을 여행하며 10년 넘게 영국 각지를 돌았고, 지역 교회, 공장, 학교에서 강연과 토론회를 열어 시민들의 공감대를 형성했다. 또한 그는 정치인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와 협력하여, 의회 안팎에서 실질적인 입법 운동을 추진했다. 윌버포스가 하원에서 법안을 제안하는 동안, 클락슨은 사회적 분위기 조성, 청원서 확보, 여론 형성을 담당하며 완벽한 이중 전략을 구성했다.
그의 노력은 결국 1807년 ‘영국 노예무역 폐지법(Slave Trade Act)’의 통과로 결실을 맺게 되며, 이는 세계 역사상 최초의 공식적인 노예무역 금지 법률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후 그는 1833년 영국 전역의 노예 해방을 위한 법률 제정에도 참여하며, 노예무역의 폐지에서 인간 해방으로 나아가는 연속성 있는 인권 전략을 실현했다.
윤리적 사회운동의 구조를 설계한 지도자
토머스 클락슨이 활동한 영국은 18세기 당시 세계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노예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얻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락슨의 캠페인은 영국 전역에서 ‘윤리적 소비’와 ‘정치적 참여’의 문화를 만들어냈다. 시민들은 노예 노동으로 생산된 설탕을 거부했고, 공정무역 운동의 전신이 되는 소비자 행동이 나타났다.
그는 또한 종교계, 여성계, 교육계와 협력하여 사회 전반의 의식을 일깨웠고, 당시 정치권 밖에 있던 시민들이 의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청원운동을 기획했다. 이는 이후 19세기 여성참정권 운동, 노동운동, 아동 노동 금지 운동으로 이어지는 시민운동의 전략적 기초를 제공했다.
영국 정부는 클락슨의 활동을 통해 윤리적 정책과 외교 전략의 새로운 기준을 형성할 수 있었고, 1807년 이후 영국은 노예선 단속과 국제 협약을 통해 세계적으로 노예무역 억제에 나서는 주도적 국가가 되었다. 클락슨은 법률뿐 아니라 문화, 종교, 시민사회 등 다차원적으로 접근한 캠페인 설계자였다.
제도를 바꾼 실천의 설계자
토머스 클락슨의 활동은 오늘날 인권운동, 시민단체 전략, 정치 캠페인의 기본 설계도로 활용되고 있다. 그는 단지 도덕적 외침을 넘어서, 증거 기반, 공공 커뮤니케이션, 정치 연계, 사회 교육이라는 실천 전략을 통해 거대한 구조를 변화시킨 인물이었다. 현재 국제 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 등 글로벌 인권단체는 모두 클락슨이 남긴 운동 모델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또한 그는 역할 분담과 협력의 중요성을 실천으로 보여준 인물이다. 클락슨은 윌버포스, 그라빌 샤프, 존 뉴턴, 여성 서명운동가들과 함께 팀을 이루었고, 각자의 전문성을 살려 하나의 법을 현실화했다. 이는 현대 사회운동에서 다양한 분야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원칙과 일치한다.
오늘날 영국에서는 그를 기리는 동상이 여러 곳에 세워져 있으며, 특히 위스비치(Wisbech)의 클락슨 기념관은 청소년 교육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그는 학문과 신념, 감정과 논리를 모두 결합하여 행동으로 옮긴 ‘실천하는 양심’의 대표자였다. 토머스 클락슨은 결국 역사를 바꾼 이념이 아니라, 제도를 바꾼 실천의 설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