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은 설계자

[역사의 숨은 설계자]45.소피 제르맹(Sophie Germain): 독학으로 불가능을 깨뜨린 수의 설계자

diary52937 2025. 7. 12. 16:21

여성에게 닫혀 있던 학문의 문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의 프랑스는 정치, 철학, 과학, 예술 모든 분야에서 거대한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신분 질서와 왕권 중심의 사회 구조를 붕괴시키고, 자유·평등·박애의 이념을 전면에 내세웠다. 혁명 이후에는 나폴레옹이 권력을 잡고 제국을 세우며 프랑스를 유럽의 중심으로 만들었고, 과학과 기술, 군사학이 전략적으로 중요시되었다. 국가 차원에서 수학과 물리학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폴리테크닉(École Polytechnique) 같은 고등기술학교가 설립되며 수학은 실용적인 학문으로 더욱 중요해졌다.

그러나 이 모든 진보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회는 여전히 여성의 교육에 매우 제한적이었다. 여성은 대학에 입학할 수 없었고, 수학이나 과학은 ‘남성의 영역’으로 간주되었다. 여성은 가정, 자수, 음악과 같은 분야에서만 지성을 인정받았으며, 수학을 좋아하는 여성은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소피 제르맹(Sophie Germain)이라는 한 소녀는 책과 숫자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찾았다. 그녀는 벽을 넘을 수 없으면, 벽을 통과할 방법을 찾아냈고, 결국 수학의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었다.

독학으로 지식의 장벽을 뚫은 여성

소피 제르맹은 1776년 4월 1일 프랑스 파리의 부유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르주아 계급으로, 정치와 상업 활동에 관여했으며, 그녀는 집안 도서관에서 철학과 수학 책을 자유롭게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족은 어린 소피가 수학에 몰두하는 것을 곱게 보지 않았다. 특히 소녀가 숫자와 논리만을 탐닉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부모는 밤에 몰래 책을 읽는 그녀를 단속했고, 촛불과 옷까지 치워버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소피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숨겨둔 촛불을 켜며 책을 읽었고, 이렇게 독학으로 수학과 과학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녀는 18세에 프랑스 최고의 수학 교육기관인 에콜 폴리테크닉(École Polytechnique)의 강의 자료를 몰래 구해 독학했다. 이 학교는 여성의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소피는 남학생의 이름인 '앙투안 르 블랑(Antoine LeBlanc)'이라는 가명을 써서 교수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녀의 편지를 주고 받은 라그랑주, 르장드르, 가우스 등 당대의 수학자들은 그녀의 수학적 능력을 인정했고, 그 이후 오랜 기간 학문적 교류를 이어갔다.

소피는 사망 직전 가우스의 추천으로 괴팅겐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학위가 수여될 예정이었으나, 1831년 55세의 나이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당시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나 학계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그녀가 남긴 연구는 이후 수학과 공학의 여러 분야에서 재조명되며 평가받기 시작했다.

탄성 이론과 수론을 이끈 조용한 설계자

소피 제르맹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은 탄성 이론(Theory of Elasticity)에 관한 연구다. 당시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금속 판의 진동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할 수학적 공식을 공모했는데, 이는 단순히 수학적 퍼즐이 아니라 건축, 군사, 기계공학 등에 직접 적용될 수 있는 핵심 문제였다. 소피는 처음 두 번의 도전에서 실패했지만, 세 번째 제출에서 성공하여 1816년, 여성 최초로 아카데미 수학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게 된다. 그녀의 논문은 당시 진동, 강도 계산, 구조물 설계 등 실제 산업적 문제 해결에 영향을 미쳤으며, 훗날 공학수학의 기초 개념 중 하나로 채택된다.

또한 그녀는 수론(Number Theory) 분야에서도 중요한 공헌을 남겼다. 특히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Fermat's Last Theorem)’에 대해 집요하게 연구하며, 정리를 증명하기 위한 조건 중 하나인 ‘소피 제르맹 소수(Sophie Germain primes)’ 개념을 도입했다. 이 개념은 특정 조건을 만족하는 소수를 통해 정리의 특정 경우를 증명할 수 있도록 돕는 중요한 도구였다. 이후 이 소수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수론 연구에 중요한 개념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녀는 철학과 수학을 동시에 탐구했으며, 데카르트의 ‘정신과 육체’ 이원론에 대해서도 수학적 사고를 확장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소피 제르맹은 ‘논리’와 ‘창의성’이 함께 작용해야 진정한 수학적 사고가 이루어진다고 믿었고, 이 철학은 그녀의 글과 논문 곳곳에 녹아 있다.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여성 최초로 공식 인정을 받은 소피 제르맹

여성 과학자의 가능성을 열다

소피 제르맹이 활동한 프랑스는 나폴레옹 시대 이후 과학과 기술에 대한 국가적 투자가 활발했던 시기였다.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정기적으로 수학 문제를 공모했고, 국가는 공학·수학·물리학을 실용적으로 적용할 인재를 적극 양성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모든 흐름은 남성 중심으로만 흘러갔고, 여성은 여전히 주변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소피 제르맹은 여성으로서 최초로 과학 아카데미의 공식 인정을 받은 인물 중 하나였다. 그녀가 1816년 받은 상은 단순한 ‘참가자 중 한 명’이 아닌, ‘문제를 해결한 유일한 수학자’로서 받은 것이었고, 이는 프랑스 과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녀의 존재는 다른 여성들에게도 용기를 주었고, 이후 19세기 후반에 등장하는 여러 여성 수학자와 과학자들의 정신적 선배가 되었다.

소피는 학교를 세우거나 제자를 키우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논문과 저서, 그리고 프랑스의 수학적 저널에 기고한 글들이 파리와 리옹, 마르세유 등의 수학 동아리와 사설 교육기관에 퍼지며 간접적인 교육 효과를 만들어냈다. 특히 진동에 관한 연구는 나중에 건축, 금속공학, 음향학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 응용되었다. 프랑스 과학계는 그녀의 죽음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녀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여성 과학사 복원 작업이 본격화되면서 그녀의 이름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수학 속에 새긴 여성 설계자

오늘날 소피 제르맹은 단순히 ‘여성 수학자’가 아니라, ‘불가능을 깨뜨린 설계자’로 재평가받고 있다. 그녀는 제도권 밖에서 독학으로 세계적 수학자의 자리에 올랐고, 자신의 이름을 이론과 정리 속에 남겼다. 현대 수학자들은 여전히 ‘소피 제르맹 소수’를 연구하고 있으며, 탄성 이론에 대한 그녀의 공헌은 구조공학과 항공우주공학에서도 언급된다.

또한 그녀는 STEM 분야(과학·기술·공학·수학)에서 여성의 진입 장벽을 무너뜨린 대표 인물로 전 세계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매년 소피 제르맹 수학상(Prix Sophie Germain)을 통해 수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룬 이들을 격려하고 있으며, 이는 그녀의 철학과 업적을 이어가는 중요한 상징이다.

수많은 교육기관과 과학 교재에서 그녀는 영감을 주는 사례로 등장하고 있으며, 특히 중학생과 고등학생에게 ‘누구든 수학자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있어 가장 좋은 예시로 활용된다. 조용한 열정과 논리의 힘으로 세상을 바꾼 소피 제르맹은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꿈을 설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