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은 설계자

[역사의 숨은 설계자]44. 조지프 랭커스터 (Joseph Lancaster)_모두를 위한 학교를 설계한 평등 교육의 선구자

diary52937 2025. 7. 12. 11:59

산업혁명과 문맹의 그림자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 영국은 역사상 가장 큰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산업혁명은 농촌 중심의 사회를 도시화로 바꾸었고, 공장은 사람들의 노동 시간을 기계처럼 조율했다. 도시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으며, 런던, 맨체스터, 리버풀과 같은 도시에는 수많은 노동자 가족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사회적, 문화적 기반은 급변하는 현실을 따라가지 못했다. 교육은 귀족이나 중산층 이상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고, 대부분의 서민과 노동자 자녀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어린 나이에 공장과 광산으로 보내졌다.

이 시기, 영국 정부는 공교육을 체계적으로 운영하지 않았다. 학교는 대체로 교회에서 운영되었으며, 교육의 질은 교사나 지역 사정에 따라 극단적으로 달랐다. 아이들을 교육할 교사는 부족했고, 교과서는 거의 없었으며, 교실도 비좁고 비위생적이었다. 특히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은 교육의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일터로 향해야 했다. 그는 아이들의 가난보다, 글을 모르는 현실이 더 큰 불행이라고 여겼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교육 모델을 직접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있어 학교란, 돈이 아닌 기회와 가능성으로 운영되어야 할 공간이었다.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특별한 교육가

조지프 랭커스터는 1778년 11월 25일, 영국 런던 사우스워크(Southwark)의 노동자 계급 가정의 10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그의 집은 퀘이커 교도 가정으로 부유하지 않았지만, 부모는 늘 정직과 절제의 가치를 강조했다. 퀘이커 교도는 당대 영국에서 소수파였지만, 평등과 비폭력, 검소함을 중요시하는 공동체였다. 랭커스터는 어린 시절부터 이웃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관심이 많았고, 19세의 나이에 자신이 살던 지역에서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무료 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단순한 자선 시설이 아니었다. 그는 학생 스스로가 서로를 가르칠 수 있는 구조를 설계해 교사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1798년, 그는 본격적으로 ‘모니터 제도(Monitorial System)’를 도입하여 새로운 형태의 교육 방식을 시행했다. 이 제도는 우수한 학생을 ‘모니터(보조 교사)’로 세워, 다른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이 시스템은 비용을 줄이고 교육의 효율을 높였으며, 특히 교사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당시 상황에서 매우 혁신적인 방식으로 평가받았다. 그는 이후 전국을 돌며 자신의 교육 철학을 전파했고, 교육기관 설립과 책 출간에도 힘썼다. 하지만 그러나 그의 시스템은 획일적이고 기계적인 암기 위주의 교육, 창의성 부족, 교사의 역할 축소 등 한계를 안고 있어서 그의 교육 운동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점차 영국 교육계에서 외면당했고, 재정적 어려움과 운영 갈등 속에서 미국으로 이주한다. 조지프 랭커스터는 1838년 10월 23일, 미국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까지 그는 교육의 평등을 주장했고,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세운 철학을 지키려 했다.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는 학교 구조를 재설계

조지프 랭커스터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학교를 단순한 ‘지식 전달 공간’이 아닌,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는 시스템’으로 재정의한 데 있다. 그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구조인 모니터 제도를 통해, 수백 명의 아이들을 한 명의 교사 아래에서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방식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 제도는 우수한 학생을 ‘모니터(보조 교사)’로 세워, 다른 학생들을 가르치고, 교사는이 이 전체 구조를 감독하는 역할을 했다. 시스템은 비용을 줄이고 교육의 효율을 높였으며, 특히 교사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당시 상황에서 매우 혁신적인 방식으로 평가받았다. .

그는 런던에서 시작된 실험을 점차 전국으로 확대했고, 그의 방식은 영국뿐 아니라 인도, 캐나다, 미국, 남미 지역까지 전파되었다. 그의 모델은 특히 대규모 도시 빈민층 아동을 대상으로 한 공교육 설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또한 교과서 자체도 쉽게 편집하여 아이들이 직접 읽고 쓰기 쉽게 만들었으며, 수학 교육, 읽기·쓰기 교육을 체계화하는 데 공헌했다. 1805년에는 『Improvements in Education』이라는 책을 출간하여 자신의 교육 철학을 설명했고, 이는 당시 영국 교육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철학은 교육이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아이가 교육받지 못한다면, 사회 전체가 불행해진다"는 말은 그가 반복적으로 강조한 문장이며, 오늘날에도 교육평등을 주장하는 이들의 슬로건으로 사용된다.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는 학교 구조를 재설계해 공교육의 기틀을 설계한 조지프 랭커스터

공교육 시스템의 역사의 시작

조지프 랭커스터가 활동한 시기의 영국은 아직 체계적인 공교육 제도가 없던 나라였다. 그의 모델은 국가가 운영하는 체계 이전에,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만든 교육 혁신 사례였다. 그는 자신의 학교를 통해 수천 명의 학생에게 문해력, 산술, 기본 윤리 교육을 제공했으며, 교회나 국가가 하지 못한 기능을 먼저 실현해냈다.

그의 영향을 받은 많은 교육가는 이후 영국 공교육 제도 형성 과정에서 그의 철학과 구조를 참고했다. 특히 1870년 영국 초등교육법(Forster Education Act) 제정은 그로부터 수십 년 후의 일이지만, 그의 제도와 철학은 그 기반을 미리 닦은 셈이었다. 또한 그의 영향은 영국에 국한되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공립학교 설계 시 그의 모니터 제도가 참고되었으며, 캐나다와 인도에서도 비슷한 시스템이 19세기 중반까지 적용되었다.

그가 설립한 ‘The Royal Lancastrian Institution’(후에 British and Foreign School Society)은 그가 사망한 후에도 운영되었으며, 현재도 교육 지원 단체로 활동 중이다. 비록 조지프 랭커스터 자신은 끝내 영국 교육 제도의 중심에 서지 못했지만, 그가 만든 틀은 국가가 제도화하기 훨씬 전부터 사회의 교육 격차를 줄이기 위한 실천적 모델로 활용되었다.

교육 평등을 주장한 설계자의 유산

조지프 랭커스터가 오늘날 교육에 남긴 영향은 단순한 시스템 차원을 넘어선다. 그는 '누구나 배울 수 있어야 한다'는 철학을 기반으로, 교육의 문을 닫은 것이 아니라 넓히는 방법을 찾았다. 모니터 제도는 오늘날 교실 협력 학습(cooperative learning), 동료 학습(peer tutoring), 멘토링 시스템 등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대규모 공교육 환경에서 학생 간 상호작용을 촉진하는 교육 설계는 그의 방식에서 많은 힌트를 얻었다.

뿐만 아니라, 랭커스터는 '비용 없는 교육'을 주장하며 사회 복지와 교육의 연계를 강조한 초기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정부가 교육에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러한 관점은 이후 복지국가 개념의 출발점 중 하나로 평가된다. 오늘날 국제기구와 NGO들이 운영하는 ‘저개발국 문해력 향상 프로그램’, ‘교사 부족국가의 피어 러닝 프로젝트’ 등은 모두 그의 교육 방식과 철학에서 유래한 구조적 접근법이다. 

결과적으로, 조지프 랭커스터는 시스템을 통해 차별을 없애려 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조용했지만 뚜렷한 신념을 가졌고, 그 신념은 교육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모두를 위한 학교’라는 개념은, 그의 평생에 걸친 실험과 헌신 덕분에 가능해진 것이며, 그는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가장 강력한 혁명을 설계한 교육 설계자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