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은 설계자]31.장 밥티스트 콜베르 (Jean-Baptiste Colbert) 프랑스 경제 재건 설계자
절대왕정 속 프랑스의 격동기
17세기 유럽은 거대한 정치적 변화와 경제적 불안 속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특히 프랑스는 전성기와 위기가 동시에 존재하던 국가였다. 루이 13세와 그의 후계자인 루이 14세가 통치하던 시기, 프랑스는 중앙집권을 강화하며 ‘절대왕정’ 체제를 완성해 나가고 있었다. 이 체제는 국왕이 법과 의회보다도 위에 있는 권력을 지니는 것으로, 당시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이 이와 유사한 방향으로 정치 구조를 바꾸고 있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대표적인 절대왕으로, 모든 권력을 자신의 손아귀에 집중시켜 ‘국가란 곧 나’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러나 겉으로는 찬란해 보이던 루이 14세의 시대에도 큰 문제가 있었다. 오랜 전쟁으로 인해 국가 재정은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고, 특히 30년 전쟁 이후 프랑스는 심각한 세금 불균형과 행정 부패에 시달렸다. 귀족과 성직자들은 세금을 거의 내지 않았고, 모든 부담은 평민 계층에게 쏠려 있었다. 지방마다 세금 징수 방식이 달라 효율성도 낮았으며, 각종 세금 중개인들이 이윤을 챙기면서 실제 국고로 들어오는 돈은 줄어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왕의 권력을 유지하고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행정력 이상으로 복잡한 구조 개편이 필요했다. 이 변화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장 밥티스트 콜베르(1619~1683)였다. 그는 단순한 관리가 아닌, 프랑스를 근대적인 국가 체계로 전환시키기 위해 철저하게 계획하고 실천한 실질적인 설계자였다.
상인의 아들에서 절대왕정의 핵심 인물로
장 밥티스트 콜베르는 1619년 8월 29일, 프랑스 북동부의 도시 랭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귀족은 아니었지만, 상업에 종사하며 일정한 사회적 기반을 가진 중산층 가정이었다. 콜베르는 어릴 때부터 회계와 숫자에 강했고, 실무적인 능력을 빠르게 갖추었다. 정식 대학 교육을 받기보다는 행정 실무 현장에서 경험을 쌓아갔으며, 이 점이 오히려 당시 귀족 출신 관리들과 다른 실용적 사고를 갖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마자랭 추기경의 서기로 정치 경력을 시작했으며, 곧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점차 높은 행정직에 임명되었다. 마자랭이 1661년에 사망하자, 루이 14세는 자신이 직접 정치를 집권하는 것을 선언하고, 콜베르를 중용하였다. 이후 콜베르는 재무총감, 해군장관, 왕실 건축감독관 등 중요한 직책을 겸임하며 프랑스 정부의 핵심 실무를 책임지게 된다.
콜베르는 단순히 왕의 명령을 수행하는 관리가 아니었다. 그는 문제를 분석하고, 장기적인 국가 계획을 수립하며,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능한 인물이었다. 왕과의 긴밀한 신뢰 관계 속에서 그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고, 단기적인 성과가 아니라 구조적인 개혁을 통해 국가를 재정비하려 했다. 1683년 그는 건강 악화로 사망하였지만, 그가 남긴 정책과 제도는 이후 수십 년간 프랑스를 지탱한 기초가 되었다.
중상주의 정책과 콜베르주의의 경제 재설계
콜베르의 핵심 업적 중 하나는 프랑스의 경제를 근본부터 재설계한 것이다. 당시 프랑스의 재정은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국가의 수입보다 지출이 훨씬 많아 만성적인 적자 상태였다. 콜베르는 먼저 세금 제도를 개편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방마다 달랐던 세금 체계를 중앙에서 통합 관리하게 하였고, 중간 세금 수금인을 줄이고 직접 세수를 확보할 수 있는 구조로 바꾸었다. 귀족과 성직자들에게 부여되던 세금 면제 특권을 점진적으로 제한하고, 공정한 세금 징수를 위한 세무 감사 시스템도 도입했다.
또한 그는 ‘수출은 늘리고 수입은 줄인다’는 중상주의 원칙에 따라 국가 경제를 운영하였다. 외국 제품의 수입을 억제하기 위해 높은 관세를 부과하고, 국내 제조업을 장려하기 위한 국가 보조금을 지급했다. 그는 특히 직물, 유리, 무기, 해양 장비 등의 생산을 국가적으로 장려하였으며, 이들을 ‘왕립 공장’으로 지정해 품질을 유지하도록 감독했다. 이러한 생산 기반 강화는 프랑스가 해외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콜베르는 산업과 무역 분야의 성장을 위해 기초적인 경제 통계 시스템도 도입했다. 그는 각 지방의 생산량, 소비, 수출입 현황 등을 수집하여 정책의 근거로 활용했고, 이는 당시 유럽에서는 매우 앞선 방식이었다. 콜베르는 경제 정책을 단순히 돈을 모으는 수단이 아니라, 국가의 자립과 성장 기반으로 보고 계획적으로 추진했던 것이다.
산업과 해군의 육성, 그리고 문화와 과학의 진흥을 일으킨 설계자
콜베르는 경제 개혁에 그치지 않고, 프랑스를 유럽의 산업 강국으로 만들기 위한 전방위적 개혁을 이어갔다. 그는 프랑스 해군의 현대화를 위해 조선소를 확대하고 군함 건조를 지원했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과 해상 패권을 두고 경쟁하고 있었는데, 콜베르는 이를 의식하여 해상 무역과 식민지 정책을 동시에 강화했다. 프랑스는 이 시기를 거치며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아메리카 대륙 등에 무역 거점을 확보하게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농업과 수공업, 제조업을 포함한 모든 산업을 국가 차원에서 장려하였다. 특정 산업에는 면세 혜택을 주거나, 인재를 외국에서 초빙해 기술력을 끌어올렸다. 특히 리옹, 루앙, 리모주 같은 도시에 왕립 제조소가 세워졌고, 이곳에서는 유럽 최고 수준의 직물과 도자기가 생산되었다. 콜베르는 또한 품질 관리 규정을 세분화하고 이를 어길 경우 처벌하는 기준도 마련했다. 산업 발전을 위한 국가 주도의 이 시스템은 오늘날의 산업 정책 모델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콜베르는 문화와 과학도 정책의 중요한 축으로 보았다. 그는 프랑스 왕립 과학아카데미(1666년)를 설립하여 천문학, 수학, 물리학 등의 발전을 지원했고, 지도 제작과 항해 기술에도 투자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17세기 후반 유럽에서 가장 과학적 기반이 탄탄한 국가 중 하나로 성장했다. 예술과 건축에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왕립 건축 아카데미(1671년)설립하여, 베르사유 궁전의 건축과 도시 계획 역시 그의 감독 아래에서 추진되었다. 그는 단순한 재정 책임자가 아닌, 프랑스 국가 운영의 전반을 새롭게 설계한 총괄 행정가였다.
프랑스를 부유하게한 세금의 설계자
콜베르가 사망한 이후, 그의 정책 중 일부는 폐기되거나 수정되었지만, 많은 부분은 유럽 국가들에 의해 모방되었다. 특히 그의 중상주의 정책은 18세기 영국, 독일, 러시아 등에서도 국가 경제 운영의 기본 틀이 되었다. 산업 육성을 위해 국가가 직접 개입하고, 과학과 기술을 경제에 연결하는 방식은 오늘날 ‘국가 주도 경제 개발 모델’의 원형으로 평가받는다.
콜베르가 세운 행정 개혁, 세금 체계, 산업 정책, 통계 활용은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프랑스를 지탱하는 핵심 제도였고, 이후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계승되었다. 그의 시스템은 근대국가의 조건인 중앙집권, 경제 기반의 자립, 행정의 전문화를 충실히 담고 있었으며, 이는 오늘날의 공공 행정 이론에서도 중요한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프랑스 내부에서는 그가 귀족의 권한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대 국가 시스템의 토대를 닦은 현실적 설계자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는 역사에 이름이 크게 남지 않았지만, 루이 14세의 위대한 시대를 가능하게 만든 실질적인 건축가였으며, 그가 만든 설계도는 3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참고될 만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