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은 설계자]25. 헨리 8세의 이혼과 영국 국교회를 설계한 토머스 크롬웰(Thomas Cromwell)
왕조와 교회의 갈등이 만들어낸 역사, 그 뒤편의 설계자
16세기 초 유럽은 겉으로는 번영과 예술의 시대, 곧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었지만, 그 속에는 거대한 종교적 충돌과 권력 구조의 재편이 일어나고 있었다. 유럽 전역의 종교개혁 물결이 일어나 루터, 칼뱅 등 개신교 사상이 확산되던 시기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여전히 강력한 권위를 유지하고 있었고, 각국의 군주들은 교황의 승인 없이는 결혼, 이혼, 후계자 문제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없었다. 이때 영국의 국왕 헨리 8세는 자신의 왕비인 캐서린과 이혼하고 안 보린과 재혼해 후계자를 얻고자 했지만, 교황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이 위기를 해결한 인물이 바로 토머스 크롬웰(Thomas Cromwell, 1485년경~1540)이었다. 그는 출신으로 보면 권력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법, 외교, 행정 실무, 종교 개혁 사상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던 실용 정치의 설계자였다. 헨리 8세의 결혼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이를 계기로 로마 교황과의 단절과 영국 국교회 설립이라는 역사적 전환을 구조적으로 설계한 인물이 바로 크롬웰이다.
역사의 바깥에서 성장한 설계자의 출발
토머스 크롬웰은 1485년경, 런던에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어릴 때부터 외국 상인과 법률가 밑에서 실무 능력과 외국어, 계산, 법 지식을 익혔다. 특히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지방에서 일하며 국제 무역과 외교 관행, 교회 권력 구조에 대한 감각을 키웠다. 이 경험은 훗날 그가 영국 국내 문제를 넘어서 교황청과의 대립을 전략적으로 다루는 기반이 되었다.
그는 귀국 후 헨리 8세의 비서진으로 일하게 되고, 당시 국왕의 측근이었던 토머스 울지 추기경의 몰락 이후, 크롬웰은 헨리 8세의 법률 자문이자 실질적인 행정 참모로 떠오르게 된다. 그때부터 그는 단순한 조언자가 아닌, 위기 상황을 해결하고 구조적으로 제도를 설계하는 실무 설계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그는 무기보다 문서와 조항, 서명과 조율로 역사를 움직이는 ‘펜의 전략가’로 불리기에 충분한 인물이었다.
헨리 8세의 이혼과 국교회 설계하다
크롬웰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은 헨리 8세의 이혼 문제를 해결한 방식 자체를 ‘정치 구조로 설계’한 일이다. 그는 단지 교황을 설득하거나 몰래 재혼을 주선하는 수준이 아니라, 영국 왕이 교회의 수장이 되어야 한다는 발상을 제도화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수장령(Act of Supremacy, 1534)”을 통해 국왕을 영국 교회의 ‘최고 수장(Supreme Head)’으로 공식 선언하게 만든다.
그는 이 법령을 입안하는 과정에서 국회(Parliament)를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이전까지는 단지 조언 기관에 불과했던 국회를 통해 국왕의 권한을 제도화하고, 법률로 교황의 권위를 무효화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 접근은 종교 문제를 정치 문제로 전환시켰고, ‘법을 통해 종교를 바꾸는 모델’을 처음으로 도입한 사례로 평가된다.
그는 국교회의 신학 체계를 루터식 개혁에 기반하되, 헨리 8세의 왕권 강화 목적에 맞도록 조절했다. 그는 종교적 개혁가가 아니라, 종교를 통치의 도구로 설계한 실용적 정치 설계자였다.
수도원 해체와 국가 재정 개혁을 설계한 행정 설계자
국교회 설립 이후, 크롬웰은 전국의 가톨릭 수도원 해산(Dissolution of the Monasteries)을 주도함으로써 수도원들이 가진 막대한 토지와 자산을 국유화하여 왕실 재정을 강화 교회 재산을 몰수해서 왕실 재정 주도하고, 잉글랜드 전역의 행정 체계를 왕권 중심으로 통합하기 위한 기초를 마련했다.
그는 지방 귀족을 관리자로 임명하고, 수도원의 땅을 다시 분배하면서 왕실-귀족-상인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경제 구조 설계를 시행했다. 또한 웨일스 법 통합(1535-1542)을 추진하여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법룰을 통일함으로써 국가 회계 시스템과 문서 행정 체계를 재정비하고, 관료 조직의 분화와 책임 행정을 제도화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단기적으로는 헨리 8세의 재정 위기를 해결하면서 황실 재정을 강화하고, 장기적으로는 근대 영국의 관료 행정 시스템의 기초가 된다. 이처럼 크롬웰은 정치와 종교의 경계를 넘어, 실무와 구조를 모두 설계한 행정형 개혁가였다.
영국의 질서를 남긴 처형당한 설계자
그러나 크롬웰의 끝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안 보린의 몰락, 이후 헨리 8세와의 권력 균형 악화, 정치적 반대파들의 공격을 받으며 1540년 7월 28일 반역죄로 체포되어 런던탑에서 참수당한다. 그가 추진했던 일부 개혁은 후퇴했지만, 그가 만든 시스템과 구조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설계한 국왕 중심의 종교 체계, 의회를 통한 입법 구조, 관료 행정 시스템, 지역 통치 조직은 이후 엘리자베스 1세 시대까지 이어져 영국 근대 정치의 초석이 된다. 역사는 그의 이름을 한동안 지우려 했지만, 그가 만든 시스템은 그대로 살아남아 ‘영국의 질서’로 기능했다.
오늘날 토머스 크롬웰은 단순한 정치가가 아니라, 정치와 종교, 법과 행정을 연결하는 구조를 만든 실무 설계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칼이 아니라 조항으로, 성직자의 옷이 아니라 법률 문서로 제도를 움직인 인물이었다. 그가 만든 구조는 결국 한 나라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의하는 기반이었다. 크롬웰을 주인공으로 한 역사소설 힐러리 맨틀의 [울프홀(Wolf Hall)-3부작]은 BBC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 과거엔 "냉혈한 권모술수가"로 평가되었지만, 현대에는 개혁가이자 실용주의자로 재조명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