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은 설계자]24. 종교와 문화를 조화시킨 무굴 제국의 궁정 설계자-비르발(Birbal)
무굴 제국이 꽃피던 역사, 조용한 설계자가 필요했던 시대
16세기 중반 인도는 새로운 제국 질서가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였다. 티무르와 칭기즈칸의 후손을 자처한 바부르로부터 시작된 무굴 제국(Mughal Empire)은 아크바르 대제(재위 1556~1605)의 통치 아래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단지 영토를 넓히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제국이 될 수 없었다. 무굴 제국이 다스리는 땅에는 힌두교도, 무슬림, 시크교도, 자이나교도 등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혼재하고 있었고, 이를 하나로 묶는 새로운 정치·문화 설계가 필요했다.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인물이 바로 비르발(Birbal, 1528~1586)이다. 본래 힌두 브라만 출신의 시인이자 학자였던 그는, 무굴 제국의 이슬람 군주 아크바르 곁에서 종교 융합과 문화 통치 전략을 설계한 실무형 설계자로 활동했다. 그는 무기를 들지 않았지만, 생각과 언어, 제도와 관용의 무기로 제국을 설계한 숨은 설계자였다.
역사의 주변에서 왕의 곁으로
비르발은 1528년, 인도 중부 마하라슈트라 지역의 가난한 브라만(힌두 사제 계급) 가정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마흐쉬 다스(Mahesh Das)로, 젊은 시절부터 시와 산스크리트 문학, 논리학에 뛰어났고, 지역 귀족 가문에서 서기로 일하다가 아크바르의 궁정에 추천되어 입궁하게 된다. 당시 무굴 제국은 다양한 지역의 엘리트들을 궁정으로 초청하고 있었고, 아크바르(Akbar) 황제는 특히 힌두 출신의 유능한 인물들을 받아들이는 실험적인 정치 전략을 펼치고 있었다.
궁정에 들어온 비르발은 처음에는 시와 언변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았지만, 곧 정치적 통찰과 종교적 균형 감각을 인정받아 실질적인 정책 조언자로 발탁된다. 그는 아크바르 황제의 9명의 지혜로운 고문단인 나바라트나(Navaratnas, 아홉 보석)중 한 명이었고, 유일한 힌두교였다. 오히려 그것이 다문화 사회를 통합하기 위한 설계자의 자격이 되었다. 아크바르는 그에게 외교, 종교, 예술, 교육 정책까지 광범위한 조언 권한을 부여했고, 비르발은 이 모든 분야에서 균형 감각 있는 실용적 조언을 이어갔다.
다종교 제국을 통합한 문화 설계자
비르발이 담당한 핵심 업무 중 하나는 바로 종교 통합 정책의 설계였다. 무굴 제국은 이슬람 군주가 다수 힌두교도를 다스리는 구조였고, 갈등과 반란의 위험이 늘 존재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아크바르는 종교 간 공존과 대화 중심의 통치 전략을 추진했고, 비르발은 그 이론적 기반과 실행 방안을 설계했다.
비르발은 황제를 설득해 힌두 사원 파괴를 금지하고, 힌두 귀족들과의 정략 결혼을 통해 신뢰를 쌓았으며, 힌두 축제 참여와 문화적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는 정책을 공식화시켰다. 그는 아크바르가 추진한 종교 철학 모임인 ‘이바다트 카나(Ibadat Khana)’의 핵심 구성원으로, 힌두교, 이슬람, 기독교, 자이나교 학자들을 함께 초청해 종교 대화를 나누는 제도를 설계했다.
나아가 아크바르가 창시한 ‘딘-이 일라히(Din-i-Ilahi)’, 즉 종교 통합 사상은 비르발의 조언과 문화 감수성을 기반으로 형성되어 종교적 관용과 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 자신은 이 사상에 동의하고 가장 먼저 귀의한 인물이었으며, 종교를 신념이 아닌 통치의 수단이자 문화적 통합 장치로 설계했던 인물이었다.
궁정 정치와 교육, 예술 행정을 조율한 설계자
비르발은 단지 종교 정책만이 아니라, 궁정의 교육·예술·언어·행정까지 조율한 설계자였다. 그는 산스크리트와 페르시아어, 힌두스탄어에 능통하여 무굴 궁정 문서와 교육 체계에 지역 언어를 반영하는 다언어 행정 시스템을 제안했다. 이는 하급 관료와 일반 백성들이 제국 행정과 가까워질 수 있는 중요한 변화였다.
또한 그는 무굴 궁정 내에서 음악과 시, 미술을 장려하는 문화 정책을 제안했고, 황제 스스로가 시를 쓰고 음악회를 여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러한 ‘문화 정치’는 제국의 권위를 부드럽고 폭넓게 전파하는 데 큰 효과를 주었다.
궁정 내 갈등 조율에도 능했던 그는, 이슬람 신하들과 힌두 관료들 간의 권한 충돌을 조정하고, 황제의 신뢰 아래 민감한 문제를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검보다 부드러운 말로, 법보다 넓은 감성으로 궁정의 분위기와 정치 질서를 설계한 인물이었다.
인도 역사 문화에 관용의 유산을 남긴 설계자
1586년, 비르발은 아프가니스탄 지역 반란 진압 작전에 참여했다가 매복 공격을 받아 8,000명 이상의 병사들과 함께 산악 전투 중 실종되며 전사한다. 그의 죽음으로 아크바르에게 큰 충격이었고, 이틀 동안 식음을 전폐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전장에서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종교 관용과 문화 융합의 정책, 다언어 행정 체계, 예술과 대화 중심의 궁정 문화는 아크바르 이후 무굴 제국의 핵심 정신으로 자리 잡는다.
오늘날 인도에서 비르발은 지혜롭고 재치 있는 신하로 전해지는 이야기 속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의 일화들은 인도 전역에서 민담으로 전해지고, 그의 재치와 유머는 이솝우화처럼 교훈적인 이야기로 각색되어 만화, 드라마,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인도 대중문화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의 유산은 아크바르 황제의 명성과 함께 숨겨졌지만, 그 명성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비르발이라는 한 명의 실용적 문화 설계자의 전략과 균형 감각이 있었다. 칼 없는 통치를 설계한 사람, 종교 갈등을 대화로 풀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 바로 비르발은 무굴 제국의 ‘보이지 않는 중심’이자 진정한 숨은 설계자였다.